텍토닉의 말해지는 위상은?
건축으로 접근하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 추상적인 관념에 따라 형태와 공간이 먼저 결정되고 재료와 구조 등 물질적인 요소의 선택이 따르는 관념이 앞서는 길이 있다. 반면에 온갖 물질적인 것들이 관념을 앞서는 길, 그것들의 속성에 따른 공간과 형태가 드러나고 상세가 결정되어 나가는 길이 있다. 나 자신은 주로 전자에 속한다. 하지만 가끔 관념에 지칠 때, 혹은 물질에 매료될 때 - 광주비엔날레에서의 비닐하우스가 그랬다. - 건축을 풀어나가는 다른 선택에 유혹을 느끼기도 한다. 그 둘이 서로 대립적인 길은 아닐 것이다. 과연 어느 한 길이 순수하게 작업의 전 과정을 지배할 수 있는지…….
지난해부터 두세 달에 한 번씩 유럽과 아시아의 젊은 건축가 20명으로 이루어진 뉴 트렌드 인 아키텍춰new trend in architecture라는 전시회와 심포지움에 참가하고 있다. 벌써 네 차례의 모임을 여러 도시에서 돌아가며 가진 바 있다. 지난번 도쿄의 모임에서 마크 굴톱Mark Goulthorp이라는 건축가의 작업에서 비롯된 논쟁이 있었다. 그의 작업은 컴퓨터의 파라미터parameter 변환을 기초로 공간과 형태를 조정해 나가는 작업이었다. 극한의 자유곡선들로 이루어진 흐르는 공간들이 만들어져 나왔다. 논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불확정성indeterminacy. 그것은 끝을 볼 수 없는 논쟁이었다. 두 번째는 바로 컴퓨터의 화면 속에서 만들어진 형태와 공간이 중력을 가진 실재의 세계로 전환되는 방식에 관해서였다. 그 문제는 사실 ‘흐름’과 ‘접힘’을 기반으로 하는 모든 작업들이 가진 근본적인 과제이기도 했다. 모니터의 화소들은 중력에 상관하지 않으니. 흥미롭게도 많은 건축가들이 보인 견해는 부정적이었다. 논쟁은 희미하게 끝이 났지만 내 기억 속에 그 과제는 텍토닉tectonic의 과제로 변환되어 남았다.
요즘 들어 근사한 3차원의 껍질로 드러나고 또 그것으로 둘러싸인 유연한 공간들이 연속되는 작업들을 많이 보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 그러한 작업을 현실의 자리에 서 있도록 만드는 방법은 ‘도미노’의 근본원리에서 벗어나지 않거나 그것을 애써 감추고 있다. 컴퓨터의 화면에서는 그것을 파라미터가 구축했다지만 현실화의 과정에서는 여전히 보수적인 방법이 동원될 뿐이다. 그래도 알레한드로 자에라 폴로Alejandro Zaera Polo의 요코하마 터미널은 조선소의 공법을 빌려서나마 계획된 공간과 구축방법 사이의 접점을 훌륭히 확보하고 있다. 비록 새로운 작업들이기는 해도 여전히 관념이 우선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이어서 물질의 과제가 따르는 작업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조금 다른 출발과 전개의 과정을 보이는 작업들이 다수 있다. 구축의 방법 그 자체가 대상이자 주체인 작업들이다. 이토 도요Toyo Ito의 센다이 미디어테크가 우선 떠오른다. 꼬르뷔제Le Corbusier의 ‘도미노’를 역사적인 맥락에 실어 재현시킨 작업으로 보인다. 새로운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현상안 속 몇몇의 예들도 그러하다. 그것들이 미디어테크와 다른 점은 구축의 주된 방법이 외피로 밀려나와 있다는 점이다. 그것에 의해 내부 공간을 엮어내는 위빙weaving이 주요 과제들이다. 그 밖에도 많은 예들이 있다. 쿨하스Rem Koolhaas의 베이징 올림픽 방송센터 현상안처럼 다이아고날의 구조가 그대로 외피이거나 이토 도요의 토즈 빌딩같은 콘크리트 월이 가진 조소성이 전체적인 구조인 동시에 개방과 폐쇄의 리듬을 만들어 내는 예들이 있다. 또는 몇몇 작은 파빌리온들의 예에서 보듯 위를 덮고 옆을 막아 공간을 만들어내는 방법과 그 공간을 지탱하는 방식이 하나로 통합되어 일정한 구축의 방법이 전체를 관통하는 경우들도 있다. 그러한 작업들의 전면에는 ‘텍토닉’의 이슈가 놓여있다.
이와 같은 현상들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과거 텍토닉이란 용어를 등장시키며 점점 분화되고 있었던 기술과 예술 사이를 그것으로 봉합해 내려던 그 때의 상황과의 차이는 무엇이고 반복은 무엇인가? 프램튼Keneth Framton은 텍토닉이 건축의 본질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지적유희와 공간적, 형태적 유희를 지나 현대의 건축에서 이제 다시 한 번 건축의 본질을 소환해 내며 관념의 과제를 물질의 과제와 결합하려 하는 것인가? 스스로 익숙하지 않은 작업들이기에 더욱더 그 기원이 궁금해진다.
텍토닉의 기원을 말할 때엔 많은 경우 19세기 독일의 건축가 젬퍼Gottfried Semper로 부터 시작한다. 더불어 뵈티허Karl B쉞ticher와 비교하기도 한다. 어원사전을 보아도 독일어나 영어에서 텍토닉tectonic의 발생은 동일한 시기로 말해진다. 예술과 기술 그리고 정신과 물질에 관하여 점점 더 이원화되어가는 당시의 건축적인 상황을 재통합시키기 위해 그 시작을, 과거 건축을 이루어 온 근본적인 기원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는 젬퍼나 뵈티허 둘 다 동일하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기원의 해석이 다르다. 젬퍼는 흙바닥에 놓인 화로가 원점이었다. 그리고 그 장소를 한정하는 울타리가 있었고 울타리 위에 지붕이 얹혀졌다. 젬퍼에게 중요한 것은 물질과 장소였고 그 다음이 공간이었으며 그리고 그것을 결정짓는 구조물이었다. 반면 뵈티허에게 장소는 원점으로써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그에게는 한정하려 하는 공간을 덮는 지붕이 우선이었다. 따라서 그 지붕을 지지하는 구조와 구조를 이루는 재료가 더 우선이었다. “맨 먼저 재료와의 투쟁에서 승리해야만 하고, 그 다음 어떤 모델이나 가이드 없이 구조와 일관된 공간 시스템을 세워야 한다.” 뵈티허에게 물질과 구조는 서로 분리되는 요소가 아니었다.
기원을 더욱 거슬러 올라가 보자. 텍토닉이라는 말은 그리스어의 텍톤tekton을 어원으로 한다. 텍톤은 ‘목수의 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대의 언어인 테크네tekne를 설명하는 중요한 예이기도 하다. 테크네는 자연으로부터 얻은 사물에 새로운 형태를 부여하는 일이자 서구에서는 기술, 솜씨 그리고 예술을 통칭하던 언어였다. 이후 테크네는 17세기에 이르러 테크닉technic이라는 말로 분화하게 되고 테크닉은 이제 본격적으로 ‘기술’만을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애당초 테크네라는 이름아래 하나였던 예술 - 테크네는 라틴어 아르스ars, 영어의 아트art의 어원이기도 하다. - 과 기술은 서로 분열된다. 아마도 17세기라는 시대가 새로운 기술들이 본격 전개되기 시작하는, 만드는 행위의 의미가 제작을 기획하는 일과 제작을 실천하는 일, 다시 말해 오늘날처럼 설계와 시공이 본격적으로 나누어지기 시작하는 지점이었던 모양이다. 그로 인해 이후 이백여 년에 걸쳐, 계속 진화되어 온 건축기술과 본래의 건축 작업 사이에, 건축가와 건축기술자 사이의 소통에 점점 더 간극이 벌어져 나갔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간극에 대한 고민과 통합의 욕구가 텍토닉이라는 새로운 논의를 만들어 내었다. 복잡한 서술이기는 해도 조금씩 그 기원을 더듬는 과정 속에서 텍토닉이라는 용어가 담고 있는 시대적인 배경과 욕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텍토닉이라는 용어는 어떤 의미에서 텍톤, 테크네라는 더 먼 시기의 어원으로부터 기술과 예술 사이의 소통과 재결합을 필요로 하는 시대의 요청에 따라 다시 소환되어 등장한 용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또 다시 텍토닉을 이야기 한다면, 다시 묻기를 그것이 19세기의 기원과 관련한 차이는 무엇이며 반복은 무엇일까? 반복이라면 건축의 본래적인 속성이 기술과 예술 사이의 통합적인 성격에 따른 재통합의 욕망일 것이다. 차이라면 그때와는 달리 건축이 새롭게 수용해야만 할 기술상의 진보가 현대에 있어서는 그리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오히려 그보다는 무언가 지난 시간 보였던 과도한 관념들에 대한 반작용일 것이다.
오늘날 기술은 이미 도구로서의 특성을 넘어, 기술이 가진 실재보다 기술이 드러내는 표상이 더욱 강하게 작용하는 시대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오늘이란 시간이 흐를수록 가상의 세계와 그로부터 영향을 입은 새로운 건축생산 방식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또한 동시에 기술이 이 시대 속에 가지는 의미에 대한 성찰적 접근을 요구하는 시대다. 개념과 물질 또는 관념론과 유물론, 그 둘 사이의 끊임없는 교차!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건축의 오랜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일이다. 보다 대립적이냐 융합적이냐 하는 차이일 뿐 그것들은 누구의 작업에서나 추상적 의미의 발현과 실재적 구현을 함께 이끌어 나가는, 이미 그 속에 내재한 쌍두마차일 것이다. 이 글을 써 내려간 솔직한 동기는 이제껏 관념 쪽으로 더 기울었다 여겨지는 스스로의 작업에 대한 반성에 있다.
글/이종호(스튜디오 메타)
'03 Space > Text'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확실치 않은 언어들 Ⅸ_한국성(Koreaness) (0) | 2014.05.22 |
---|---|
확실치 않은 언어들 Ⅷ_근대와 현대(modern & modern(contemporary)) (0) | 2014.05.22 |
확실치 않은 언어들 Ⅴ_공동체(Community) (0) | 2014.05.22 |
확실치 않은 언어들 Ⅳ_일상(Everyday Life) (0) | 2014.05.22 |
확실치 않은 언어들 Ⅲ_컨텍스트(Context) (0) | 2014.05.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