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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Space/Text

확실치 않은 언어들 Ⅴ_공동체(Community)

‘공동체’, 가려서 쓰자.

건축가는 대체로 낙관주의자optimist이며 인도주의자humanitarian이고 전체주의자totalitaranian들이다. 건축이 그렇게 만든다. 공동체, 그보다도 커뮤니티, 수도 없이 말해진다. 공동주거에서 말해지고 오피스빌딩에서 말해지고 거리와 광장에서도 말해진다. 아주 쉽게 그렇게 말한다. 그것으로 현대 사회가 가진 많은 그늘들을 덮을 것이라 믿는다. 공동체에 반하는 어휘인 개인 또는 자유는 적어도 건축에서는 차악(次惡)이다. 개인이 공동체의 억압(?)으로부터 겨우 빠져나왔던 역사적 과정에 대해서는 별무관심이다. 오늘날 치열하게 전개되는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논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농경사회에서 불분명했던 토지의 사적 소유가 근대사회로 넘어오며 드디어 규명, 보호되기 시작했다.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근대의 과정이 진행되었고 아직 남아 진행되는 과제들, 사회적 소수자들에 관한 과제 등등을 예외로 하면 많은 부분 성취되고 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너무 많이 나갔다. 오히려 정도가 지나친 개인의 분화가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한 이유로 개인 또는 자유와 공동체 사이의 긴장된 논의들이 계속 이어진다. 긴장의 해소를 위해 공동체적 자유주의,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라는 절충적 용어들도 등장한다. 지나치게 분화된 개인들로 인해 비롯되는 많은 이야기들 속에 소외, 파편화, 해체 그리고 이기 등이 있다. 건축가들은 그러한 이야기들에 쉽게 반응한다. 그리고 그 대안을 미분화되지 못한 용어인 ‘공동체-커뮤니티’로 묶어 직결시킨다. 공동체라는 단어를 만나게 되면 언제나 이렇게 질문하곤 한다. 지금 말하는 공동체가 어떤 종류의 공동체인가? 설혹 우리가 비교적 낙관주의자이며 인도주의자일지라도 말하는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이며 말하는 상황이 어떤 상황인가에 따라 좀 더 미분화된 맥락에서 가려 쓸 때 용어의 정합성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과제의 목표가 분명해진다.

 

공동체의 기원은 수렵이나 채취의 시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안정된 정주가 발생하는 농경시대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옳다. 한 마을이 힘을 합하지 않으면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는 시절이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서로 낯이 익으며 심지어는 서로 간의 속사정도 익히 알고 있었다. 결합의 끈은 지역이며 토지였다. 동시에 핏줄이었다. 강력한 연대와 그것을 이끌고 가는 체제가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향약, 대동 등이 그것이다. 생산의 과정 뿐 아니라 일상도 그 속에 있었다. 모든 에너지들이 그 공동체의 싸이클 속에 들어있고 관리되었다. 그것이 농경(촌락)공동체이며 또 달리 부르면 대면face to face공동체이다. 내부의 결속은 매우 강하고 외부에 대해서는 배타적이었다. 그것이 힘이었으며 생존의 조건이기 때문이었다.

 

산업사회 이후 오늘의 도시가 형성되었다. 생산 방식이 달라졌고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모여들었다. 농경공동체로부터의 지연적, 혈연적 관계는 아직 뿌리가 깊었다. 출신 지역과 성분이 다른 작은 공동체들 사이의 싸움도 치열했다. 영화 ‘갱스 오브 뉴욕’의 장면들은 종교적 갈등이기도 하지만 과거의 공동체가 도시로 와서 서로 공존하는 규칙을 아직 마련하지 못한 장면들이기도 하다. - 이런 장면들을 거치면서 도시공동체의 규범들이 만들어져 왔다는 생각이 들면 때론 섬뜩하다. - 농경공동체의 습성들은 점차 도시의 새로운 조건들에 익숙해 져야 했다. 더욱 복잡한 관계들이 발생했고 관계를 중재하는 제도들이 생겨났다. 도시적인 삶도 발생했다. 과거처럼 모든 일상이 전체에 구속되지 않는 자신들만의 시간도 만들어졌다. 과거의 공동체가 모두 서로를 잘 알고 있는 기명의 관계임에 반해 새로운 공동체는 충분히 익명적이었다. 가슴 여린 시인은 노래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엉뚱하게도 섬에 있는 온갖 민박집의 카피에 등장하는 이 노래는 사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그리워하는 노래가 아니던가? 익명의 성격이외에도 도시공동체의 특성은 사적 이익의 추구이며 경쟁의 관계이다. 지극히 개인적이다. 도시의 구성원들은 각자 개별적인 이유로 그곳에 산다. 생존의 근본적 조건이 그들을 한 데 묶지 않는다. 그들을 묶는 것은 같은 대기를 호흡하고 같은 종류의 소비활동을 하고 같은 이슈에 호기심을 가지는 것들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 사이에 무엇인가의 중재하는 조건들이 있다. 그들의 관계는 일시적이다. 관계의 조건이 소멸되면 그들의 관계도 소멸된다. 그래서 짐멜Georg Simmel은 오늘날의 도시공동체를 중재적 공동체라 불렀다.

 

수년 전의 건축대전에서 도시 공동주택을 다룬 출품작이 있었다. 농경공동체와 다른 도시공동체의 성격을 비교적 정확히 끄집어내고 그것을 근거로 작업을 해 냈다. 흔히 다루듯이 도시 공동주거를 통해 마치 농경-대면의 공동체를 희망하는 순진한 작업이 아니었다. 전개의 과정과 결과도 훌륭했다. 심사자로서 당연히 열심히 지지하였고 대상을 수상했다. 도시공동체의 속성들을 우리 계획가들이 다루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속성과 희망이 서로 모순 관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요순시절(?)을 그리워하는 터무니없고 순진한 낙관주의자들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세상이 작동되는 방법들에 관한 관찰과 처방이 더 있어야 한다. 그러자니 특히 도시공동체란 무엇인지, 아니 공동체를 빼고서라도 도시에서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또는 모여살기의 현상에 관한 관찰과 학습이 더 필요하다.

 

농경에서 도시로 이어지는 공동체의 이야기를 풀어놓았지만 이제 세월이 더 흘러 다른 종류의 공동체 이야기를 추가해야만 한다. 접속공동체on-line community의 이야기이다. 이제까지의 논거들이 도시나 농촌의 실제 공간들 속의 이야기였다면 우리 시대에 와서는 가상의 공간과 그곳에서의 공동체가 거론되기 시작한다. 특히 이 나라 사회에서 더욱 그렇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의 강도는 무척이나 강하다. 이슈가 하나 떠오르면 즉각 수십 개의 카페가 만들어진다. 블로그를 열어놓고 불특정 다수의 지나가는 행인을 맞아들인다. 또 말을 건다. 통계를 들이댈 필요도 없이 인구 대비 세계 최고일 것이다. 정보 인프라의 도움인지 고유한 품성들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도시 공간의 체계가 일상의 삶과 잘 들어맞지 않으며 그 어느 나라보다도 매우 열악한 도시 공공영역의 양과 질 탓이 아닌가도 생각해 본다. 이와 같은 접속공동체on-line community는 이 나라에서 하나의 현상으로 그치지 않고 사회적인 활동들의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된다. 그 속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모아지고 걸러지며 행동화된다. 여중생을 추모했고 대통령을 뽑았다. 가장 결정적으로는 월드컵의 현상을 낳았다. 그것은 접속공동체의 담론 속에 또 다른 논의를 추가했다. 오프라인 현상 또는 오프라인 공동체로 불리지만 공동체의 계보 속에서 아직 정확한 이름을 얻어내지 않았다. 그 지점에서 우리의 관심사인 도시공간과 관련되는 새로운 담론과 가능성들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그 이름을 접촉공동체skinship, osculatory community라 불러본다. 월드컵 이전에 수많은 징후들이 있어왔다. 전혀 낯모르는 사람들끼리의 온라인 모임들이 번팅이다 정모다 이름을 붙이면서 서로 얼굴을 맞대려 한다. 그러한 계기가 아니었으면 이 도시 생활 속에서 그리하고픈 동기도 계기도 없었던 사람들이다. 단지 무엇인가를 공유했다는 이유 만으로 직접 만나기를 희망한다. 현상이 채 해석되기도 전에 통계숫자는 전체 온라인 가입자의 반이 그와 같은 만남을 긍정하고 있다. 또 그 중 반이 실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월드컵이 있었다. 그러한 접촉공동체가 서로 만나는 오프라인의 공공영역은 과거의 도시가 가져왔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공공영역들이다. 아니 그래야 하는데 아직 그렇지 못하다. 전통적인 상업공간들과 뒤섞인다. 공공이되 좀 더 개인적이고 때로는 은밀하다. 이 상황 속에 계획가들의 과제가 놓여 있다. 서구적 의미의 도시로서 시민사회의 공공영역은 채 확보되지 못하였고 앞으로도 그러한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시민’이 달라졌고 ‘사회’가 달라졌다고 본다면 접촉공동체를 통한 새로운 공공영역의 논의는 우리 사회의 도시 공간을 위한 새로운 돌파구일지 모른다.

 

공동체의 논의를 분화시키고 그에 맞는 도시공간을 상상하며 실천해 나간다면 우리는 도시에 관한 이야기 중에 하나 더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해 나갈 기회를 얻게 되리라 본다. 그러니 입을 열어 ‘공동체’를 말하게 될 때면 그것이 어느 지점에서의 말인지 한 번 더 생각해보자.

 

글/이종호(스튜디오 메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