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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Space/Text

확실치 않은 언어들 Ⅲ_컨텍스트(Context)

컨텍스트라는 말은 이 나라 도시에서 아직 유효한 말인가? 유효하되 다른 맥락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말인가?
 
고(高) 컨텍스트의 사회와 저(低) 컨텍스트의 사회가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발신자와 수신자가 정보, 사회적 통념 등에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 많아 아주 작은 의사교환으로도 발신자의 의도를 정확히 읽어낼 수 있는 사회를 고 컨텍스트의 사회라 한다면 저 컨텍스트의 사회에서는 서로 간에 공유하는 바가 적어서 비교적 많은 단어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하여야만 의도한 바가 정확히 전달된다는 것이다. 척하면 알아듣는 고 컨텍스트의 사회로는 일본이 가장 앞에 서 있으며 그 다음에 중국과 한국이 자리한다고 한다. 그리고는 아프리카 및 아랍, 라틴 국가들, 프랑스, 영국, 미국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스위스, 독일을 든다. 
- '문화를 넘어서', 에드워드 T. 홀 
 

흥미롭지 않은가? 도시의 컨텍스트라는 문제에서 보면 그 순서는 정반대의 상황이라 생각되는데 말이다. 저쪽(라틴, 게르만어권)의 도시들은 비교적 균질한 ‘고 컨텍스트’의 도시인 반면 이 쪽은 여러 면에서 매우 복잡한 ‘저 컨텍스트’의 도시이다. 그러나 옛 한양이 남긴 사진들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연이은 기와집들로 이루어진 바다 위에 궁궐의 몇몇 건물들이 적당히 솟아있어 어느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과 다르지 않은 균질homogeneous의 경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용하다. 그렇지만 오늘날은? 시끄럽다. 거리의 간판들을 포함하여 소위 지독한 혼성의 도시경관을 드러내고 있다. 분기점은 어디에, 왜 있는가? 많은 경우 그 첫째 이유를 동아시아 사회에서의 ‘도시화의 경험 부재’를 들고 있다. 하지만 틀렸다. 만일 ‘근대적 도시화의 경험 부재’라고 달리 말한다면? 조금은 사실에 가까워진다. 그래도 아직 모자란다. 그 각각의 사회들이 가진 경험의 과정들을 더 들여다보기 전에는 확신할 수 없다.

 

시안과 베이징, 국내성과 상경(발해) 그리고 서라벌, 나라와 교토 등등. 대표적인 아시아의 도시들에는 크든 작든 주례(周禮)의 동관고공기(冬官考工記)로부터 이어지는 도시구조의 흔적이 공통적으로 서려있다. 한참 후의 계획도시 한양은 땅의 형국에 따른 변용을 가졌으되 근본적 규범은 동일했다. - 신도시 한양 만들기에 관한 규범과 변용의 과제는 다른 논의가 남아있다. - 도시화의 경험은 구조뿐이 아니다. 교토의 나가야(長屋)나 베이징의 사합원(四合院)은 등을 맞대고 공존하는 도시주거의 유형을 보여준다. 한양에서의 도시주거 유형이라면 훗날 개발업자 도시한옥이 등장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어쨌든 오늘에 보이는 양 진영 도시 컨텍스트의 고, 저 차이를 ‘도시화의 경험부재’로 단순히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근대적 도시화의 경험 부재’라는 명제는?

 

좥도쿄모노가타리(동경이야기)좦라는 책 - 오즈 야스히로의 영화와는 다른 - 속에는 메이지 유신을 전후로 하여 오늘의 도쿄에 이르는, 전통 사회와 도시로부터 근대에 이르는 변화의 모습들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에도의 전통적인 삶 위에 새로운 도시적인 삶들이 겹쳐지며 겪게 되는 물리적 환경의 변화들을 세심히 담아내고 있다. 소위 자생적 근대화의 과정이었다. 자생적 과정을 통해 도시적인 삶의 내용과 그것을 담는 삶의 형식 사이의 균열을 만들어 내지 않을 수 있었다. 공습으로 폐허가 된 이후, 전후의 재건 과정 또한 도시가 이미 구축해 온 기본 구조 위에서의 재건이었다. 본질적인 맥락은 그대로 유지 될 수 있었다. 공습을 피한 교토 또한 마찬가지였다. 안도 타다오의 출세작인 스미요시의 나가야에서 보여지듯이 교토의 고유한 구조와 획지방식은 지극히 현대적인 오늘날의 삶의 내용을 담아내는 데 별다른 갈등을 드러내지 않았다. 밀도의 문제는 평지라는 조건에서 해결해 나갔다. 자생적 과정 속에서 ‘근대적 도시화의 경험’은 자연스럽게 누적되었다. 서둘러 말하자면 ‘자생적인 과정’, 바로 그것이 일본의 도시가 오늘날 다른 동아시아의 도시들과 같은 듯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중요한 이유이다.


베이징에서의 근대적 변화는 아주 완만하였다. 아편전쟁 이후 조계지는 멀리 천진에 설치되었고 제국의 자본은 샹하이의 와이탄에 집중되었다. 홍콩은 백지 위의 그림이었다. 따라서 근대를 통과해 나가는 도시적 삶의 내용과 형식 사이에는 이렇다할 균열의 기회는 마련되지 않았다. 오히려 샹하이에서는 이롱주택이라는, 이 지역 전통의 2층 삼합원이 영국의 타운하우스와 이종교배하는 새로운 도시주거 유형을 만들어 낼 정도의 여유를 보였다. 아주 최근에는 이롱주택으로 이루어진 지역을 재개발하면서도 그 유형을 요모조모 만져 나가면서 신텐지(新天地)라는 근사한 중심유흥지역을 만들어 낼 정도였다. 따라서 ‘근대적 도시화의 경험’은 적절한 합리와 실용 위에 축적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 두 가지의 균열이 따라붙는다. 인민공화국의 성립 이후 베이징의 중심, 자금성의 전면은 전형적인 사회주의 도시 만들기의 원칙에 따라 재구축되었다. 수많은 영역을 허물어 내면서 체제가 필요로 하는 광장을 만들었다. 주변에는 혁명과 인민을 칭하는 시설들이 들어섰다. 사회주의 도시화의 경험이자 시간적 균열이다. 셴젠과 광저우 등의 경제특구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속도의 도시화 과정이 급속하게 벌어졌다. 샹하이의 난징로는 사람들로 넘쳐 나는데 푸동에서는 아무도 걷지 않는다. 자본주의 도시화의 경험이자 공간적인 균열이다. 과정의 속도와 과시욕들이 빚어낸 속도 조절의 실패이다. 당분간은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이곳 서울에서는 어떠했던가? 다른 두 나라의 상황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구한말 이후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고종의 도시계획은 중단되었다. 구조는 뒤바뀌고 영역은 잘려지거나 또는 커다랗게 포획되어 나가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의 뼈아픈 과정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진행은 우리에게 삶의 형식과 내용 사이의 균열을 메워나갈 수 있는 여유를, 자생적으로 ‘근대적 도시화의 체화된 경험’을 해 나갈 기회를 빼앗아갔다. 차라리 인도에서처럼 뉴델리를 만들 것이지! 그리고 해방과 동란 이후 이 도시의 팽창은 도시의 지형이 감당해 나갈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개발시대로 넘어와서도 모든 것은 양의 문제였고 자본의 문제였다. 주위를 돌아볼 틈도, 도시의 윤리와 가치를 말할 틈도 없었다. 그러기에 이 곳 서울에서 ‘근대적 도시화의 <자생적> 경험 부재’를 말한다면……. 그것은 맞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이 나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저(低) 컨텍스트의 도시들을 가지게 된 것이다.

 

건축과 도시에서 사용되는 컨텍스트라는 용어는 모더니즘의 도시가 보여준 지나친 보편화에 대한 반동으로 새롭게 이야기된 용어였다. 그것은 역사, 지역 그리고 장소 등등의 다분히 포스트 모던적인 반성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컨텍스트라는 용법은 다분히 구조적이며 경관적인 의미를 지녔다. 따라서 이 나라의 ‘근대 이후’ 도시에서는 그와 같은 맥락의 용법은 거의 유효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컨텍스트라는 명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세상이 무수한 관계들의 그물망 속에 놓인 것이 사실인 이상, 아니 무수한 텍스트들이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이상,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에 놓인 컨텍스트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하물며 관계의 농도가 더욱 더한 도시에서야……. 사라진 척 간주하며 내 앞에 놓인, 내가 만들어 낼 텍스트에만 몰입할 수가 애당초 없다. 그렇다면, 구조적이거나 경관적인 용법의 컨텍스트가 아니라 한다면, 도대체 어떤 종류의 컨텍스트가 이 나라의 도시에 남아 우리들의 발견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발견을 기다리고 있는 컨텍스트는 이곳에 없다. 다만 새로운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컨텍스트만이 있을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컨텍스트란 해석의 과정 중에 만들어지는 그 무엇이다. 컨텍스트는 항상 그곳에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속에 들어감으로 해서, 나의 해석에 의해 변화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속으로 들어가려는 자세(해석)와 관련한 어떤 것이다. 많은 다른 아시아의 도시들은 아직 더 팽창의 시간을 겪어 나가겠지만 이 나라의 도시들은 이미 정체와 조정의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 그 사이 채 가다듬지 못했던 여러 가지의 균열들을 메워 나아가야 할 때이다. 균열은 의미로 메워질 수 있으며 의미는 우리들이 내리는 해석들로 만들어진다. 해석들이 새로운 맥락에서의 컨텍스트(맥락)를 요동치게 만든다.

 

글/이종호(스튜디오 메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