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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Space/Text

건축단상_기념비와 상징성

 Monumentalism & Presence

 

건축은 역사이래로 고대 오벨리스크나 피라밋으로부터 70년대 브뤼탈리즘 등을 망라하여 건축으로서의 상징성과 함께 권력자의 권위, 또는 종교의 위대함, 혹은 부의 상징으로 의미되었다. 또한 때로는 건축 외적인 장르로서 미학의 의미로 상징되는 왜곡의 역사였다.

 

의미되는 것과 기념비

아전인수라는 말은 그 본말의 의미가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건축에서의 교육, 문화, 행정, 사회 등을 포함한 포괄적 의미를 총 망라해서 건축문화를 지켜보노라면 어쩌면 그렇게 딱 어울리는 표현일까 하는 조소를 금할 길 없다. 인류의 역사이래로 사람은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러한 능력은 수많은 기념비적 조형물을 이 땅에 남긴다. 그러한 행위 때문에 사람은 문화라는 것을 이루며 그것이 기억되기를 갈망하기에 사람의 어휘 속에서 기념비라는 용어가 탄생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조형물은 기억됨으로써 의미 되고, 의미 됨으로써 비로소 그것이 건축이든 조형물이든 기념비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 기념비는 굳이 실례를 들지 않더라도 시간의 개념으로는 과거를 기억하기 위한 역사적인 기념비, 미래에 대해 동시대의 발자취를 남기기 위한 기념비, 혹은 현 행위의 우월성을 상징하는 현재진행형인 기념비가 있을 것이다. 또한 사람의 행위에 따른 장르별로 굳이 분류한다면 역사적인 기념비, 정치적인 기념비, 문화적인 기념비 등이 있을 수 있다.


오늘날 건축에 있어 그 당위성이나 목적으로 공공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제 그 누구도 반론의 여지가 없으며, 어느 건축의 장르를 막론하고 개념으로서 공공성을 강조하는 것은 현대 시민사회의 발달과 함께 많고 적음을 떠나 당연한 것이다. 즉 한 위정자의 정치적 목적은 기념비적인 성격보다도 공공성이 더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며, 혹은 한 개인의 주택이라 할지라도 땅 위에 세워지고 난 이후부터는, 한 개인의 사유물이 집합됨으로써 도시가 형성된다는 측면에서, 공공의 목적에서 결코 멀어질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제도적으로도 지구단위계획 등 많은 장치들이 건축에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의 건축물을 짓는데 있어서도 건축주, 엔지니어, 행정의 삼각 구도나 그 행위의 장치로써의 설계, 시공, 감리 같은 제도가 있는 것 또한 그 공공성을 이루기 위한 제도일 것이다.

 

실상 제도나 시스템 뿐만 아니라 우리 관념의 세계에 있어서 과연 우리가 건축을 문화로서, 기념비적인 사고와 아량으로 건축을 시행하고 계획하고 짓고 있느냐에 대해서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얼마 전 한강변으로 사무실을 옮겨 수시로 강 건너편의 적나라한 우리의 주거건축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휘황찬란한 분양광고의 조감도 속에서 건설사의 로고 이외에는 대체 어떠한 건축의 상징성이 있는지 모를 노릇이다. 혹 그들이 말하는 상징성이란 요즈음 흔히들 말하는 재테크 수단으로서의 상징성인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에게는 건축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적지 않은 수가 그 아파트의 평면 속에 오늘도 살고 있을 텐데, 만족하는지 묻고 싶다.


지금은 뜸하지만 오랜 외국생활을 지나 서울로 돌아와 한동안 ‘바꿔! 바꿔!’ 란 노랫말 같은 구호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세계화라는 말과 함께 11위의 경제대국이란 말도 들려왔다. 흔히 우리 건축가들은 주거건축이 건축의 꽃이라고들 말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의 실상은 과연 어떠한가? 우리 주거건축의 환경이나 그 의미가 빠르고 값싸고 효과적인 논리의 결과로서의 모습은 아닌가? 한 술 더 뜬 우리의 건축법은 아예 그러한 건축 평면만이 존재하게끔 아주 잘 규정되어 있고 예시 또한 어쩌면 그렇게 상세한지 조소를 금할 길 없다. 예를 들어 소위 ‘띠 조경이라 불리 우는 1m 이상인 경우’ 혹은 ‘공공의 통행과 주차인 경우’에 필로티로 인정한다든지 하는 내용은 행정 편의주의적 발상이자 무지의 극치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건축가들은 왜 그렇게 건축주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모습인지. 소위 1군 건설사의 광고에서는 나도 그 나라에서 10년 이상 유학하고 살았지만 생전 처음 들어보는 외국건축가의 얼굴과 함께 “우리 아파트에 오시면 당신의 격조가 어쩌고저쩌고…….” 요즈음 웰빙 바람이 유행인지 소위 위생적이고 건강한 뭐 그런 뜻일 것인데 그 건강하다는 기상천외한 평면이 정말로 궁금하다.


우리가 추구하고 건축하는 문화가 이런 식이라면, 소위 군, 관, 민 합작은 저질문화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공공성을 상징하는 관공서 건축 또한 세워졌다 하면 이것이 테헤란로의 업무시설은 아닌지 구분이 안 되고, 집합주거단지 속에 지어지는 간판으로 도배한 근린생활시설하며……. 처음 청계천 복원 계획 소식을 듣고 이제야 70년대의 브뤼탈한 도시의 모습으로 바뀌는가 하고 기대하였지만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수많은 다리의 모습들이나 청계천의 단면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도대체 그 계획의 역사성이나 도심에서의 그 기능으로서의 역할 등에 대해 연구나 한 것인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국운이 어쩌고 하며 한동안 나라를 떠들썩하게 수도를 옮긴다고 야단법석들이었다. 옮기고 안 옮기고의 정치적 의미쯤이야 나로서는 관심 밖이지만 신도시를 만든다면서 게다가 수도 비슷한 무엇을 한다면서 무슨 건축적 전략이 있는지는 들어볼 수가 없는 노릇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건축의 출발점은 아이디어에서 비롯될 것이다. 그것이 정치적 의미이든 사회적 요구에 의한 의미이든 문화적 결과로써 표출된 건축아이디어이든 간에 그러한 요구들이 건축되어 질 것이라면 우리는 건축가들이기 때문에 건축의 충분한 의도를 개진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 할지라도 그것이 건축으로서 충분히 고려되지 않고 지어진다면 설사 지붕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건축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정치적인 쇼 일뿐이고, 집장사들의 얄팍한 상술일 뿐이며, 행정편의주의자들의 무지의 소치일 것이다. 설사 그들의 짝퉁 건축가들이나 선호하는 문화 속에 비록 우리가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우리는 비평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학생들이 외치던 구호지만 정말로 이제는 좀 바뀌어도 되지 않을까? 괴상망측한 시험제도로 건축가를 양산하는 케케묵은 자격시험이라든지, 제대로 된 연구논문하나 없는 지구단위계획이라든지, 도대체 뭘 심사하는지 모를 미관심의라든지, 있는 자나 없는 자나 편 가르는 입찰자격사전심사제도Pre-Qualification 같은 것들.


현실의 괴리감과 함께 나의 학생시절 그 순수했던 기억으로 돌아가 존경하던 앙리 시리아니 교수의 몇 가지 교훈을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한다.

 

건축
건축은 공공에 대한 너그러움을 가진 개념을 불러일으키는 자세의 연구를 의미하며, 각각의 사회는 이러한 의도에서 여러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건축한다. 건축은 의도된 행위이고, 아이디어가 없는 의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건축가
건축가는 세상을 변화 시키고자 하는 욕구에서 그 힘을 갖는다! 중력 - 여기서의 중력은 억압 - 에 반하는 그러한 건축을 행하는 행위자. 그는 자연에 대하여 인공을 찬양하며 대지에 평행하는 수평선을 긋는 의도된 추상같은 것이며, 이는 건축가에 있어서 이상을 의미한다.
 

건축 계획의 교육법
프로젝트가 없는 건축은 존재하지 않으며, 의지가 담기지 않는 프로젝트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지각 있는 행위를 분출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건축에 있어 교육법이다. 건축설계라는 것은 그 현실가능성에 있으며 현실성에 대한 그 방법론과 결과를 갖는 의도에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글 / 진영주(사람과 건축) c3korea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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