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ral of Architecture
우리 건축가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경제적인 성공을 위해서? 사회에 널리 알려진 유명 건축가가 되기 위해서? 아니면 단지 건축을 사랑해서? 건축에 몸담고 있는 몇 사람이 모이면 항상 거론되는 화두이고 풀 수 없는 과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건축과 인연을 맺은 많은 사람들 중에 건축의 도덕성을 깊이 고민해본 적은 있는가? 대학시절 은사님께서 강조하시던 바른 건축, 바른 건축가는 무엇일까? 루이스 칸 Louis Kahn이 강조했던 정직한 건축 honesty architecture은 도덕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건축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도덕성 이상의 가치가 있으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던 그의 건축인생은 분명히 교훈적이라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건축대학을 졸업하고 건축사무소에서 일을 하며 사회를 경험한다. 요즈음 건축과 학생들 질문의 대다수는 건축사무소의 연봉과 대형사무소와 소형사무소가 가진 환경의 차이를 알고 싶어한다. 건축의 본질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졸업 후 건축을 조금 더 깊이 느끼고 싶다는 사람을 만나볼 수가 없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고민하는 모습도 찾기 힘들다. 단지 좋은 직장을 들어가고 후일 유명한 건축가가 되겠다는 너무나도 막연하고 실현가능성이 없는 생각들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책임은 우리 기성세대에 있는 것이 아닐까? 후배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는 선배건축가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후배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건축가 또한 극소수이다. 물론 러브호텔 설계를 요구하는 건축주를 사회에 고발하는 바른 건축가도 존재하고 있지만 대다수의 건축가는 도덕적인 이상보다는 배부른 현실을 추구하고 있다. 조금 더 먼 미래를 바라보면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들이 분명하게 구분될 터인데, 우리의 현실은 건축사무소를 돈을 만드는 장소로 전락시키고 있다. 그래서인지 선망의 대상이 되는 건축가는 있을 수 있지만 마음속으로부터 존경하는 건축가는 많지 않은 것 같다. 본인을 포함한 많은 건축인들이 외국의 건축가를 존경의 대상으로 갖고 있어야 하는 현실이 아쉽기만 하다.
그렇다면 도덕적으로 어긋난 건축행위는 무엇인가? 우선 이 땅에서 건축가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몇 가지가 있을듯하다. 신인건축가의 등용문은 어디에 있을까.
가장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현상설계일 것이다. 하지만 현상설계는 언제나 비슷한 계획안으로 항시 거론되는 사무소가 당선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현상설계당선자는 발표가 결정되기 전에 이미 거론되기도 한다. 현상설계라는 말의 의미를 상실한 현상설계가 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미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도덕성은 접어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하여 건축사무소의 대형화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서울에서 동네마다 있던 ‘구멍가게’가 그룹사의 편의점으로 바뀌었듯이, 건축사무소도 소규모로 지속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다. 대형사무소에서는 대형 프로젝트를 소형사무소에서는 소형 프로젝트를 해야만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현상설계나 턴키turn-key는 대형사무소 또는 대형사무소 컨소시움consortium 등의 방식으로 진행하여 소형사무소에서 정보를 접수할 때면 이미 계약은 끝난 후일 것이다.
두 번째로 생각해볼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의도를 나타낼 수 있는 건물을 지어 사회 또는 건축계에 소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그 건물을 소개하는 방법도 찾기 어려울 것이고, 평가 또한 공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부익부 빈익빈의 사례가 이곳에서도 적용되는듯하다. 평가의 기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건축가로서의 가능성일 것이다. 신인건축가에게서 완성된 건축관이나 건축물의 완성도를 거론하며 비판하는 것은 맞지 않다. 평가자는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그들의 가능성을 찾아내어 격려하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들의 건축적 자질이나 가능성보다는 각 개인의 이력에서 그들을 평가하는 사례를 발견하곤 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는 도덕성의 빈곤함을 경험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재능 있는 많은 신인건축가들은 좌절하고 실망하며 건축의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배워나가면서 자신의 행로를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 또한 언젠가는 선배들의 행로를 답습하며 건축가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우리에게 국제적으로 명성 있는 건축가가 있는지 한번 되돌아보자. 뉴욕에서 20년 가까이 건축교육과 실무를 경험했지만 한국의 건축이나 건축가의 이름을 들어본 적은 없다. 뉴욕의 건축전문서점을 샅샅이 찾아보아도 한국의 건축에 대한 소개는 발견할 수 없었다. 나에게도 그것은 커다란 의문이었고 실망이었다. 왜일까? 왜 우리에게는 국제적인 건축가가 없는 걸까? 그것은 국력의 약세 때문도 아니고, 건축가 각 개인의 자질이 모자라서는 더욱더 아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도덕성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직하지 못한 우리의 건축작업에서 야기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자신만의 성격을 고집하며 건축활동을 지속적으로 진행하는 건축가가 몇 명이나 되는지. 이론의 부재는 물론이고 건축물의 독창성마저 기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뚜렷한 색깔을 보여주며 건축작업을 하고 있는 우리의 건축가는 누구인가?
우리는 외국의 사례조사를 벤치마킹의 기회로 이용하여 외국의 유행을 맹신하며 따라가는 경향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0,000평 규모의 건물을 벤치마킹해서 100평의 규모의 건물에 접목하려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학교를 설계하는데 병원이나 교회를 벤치마킹하는 경우도 종종 목격된다. 그것은 시작부터 잘못된 사례조사이다. 그 건물의 성격을 잘못 파악한 것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그전에 외국의 경우 설계비, 공사비, 설계기간, 공사기간 등의 건물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필수조건들이 국내의 사정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외국의 건축가를 초대해서 이 땅에 설계를 부탁하는 것은 환영할 수 있지만 그 처우 문제나 방법에 있어서는 아직도 공평하지도 전문적이지도 못하다. 설계비의 90%를 외국의 건축가에게 주고 1/3의 공정을 부탁하고, 나머지 2/3의 공정을 10%의 비용으로 국내의 건축사무소에서 해결하려는 사례도 볼 수 있다. 언제까지 우리는 그들의 그림자에 서서 동상이몽에 만족하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하고 그것을 개발, 발전시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해야 한다. 건축의 근본적인 어휘는 인종과 대륙을 넘어서 상호 소통될 수 있는 것이며, 좋은 건축은 모든 사람에게 좋은 건축일수 밖에 없다. 나에게 감동을 주는 대가들의 드로잉은 나의 선배에게도 나의 후배에게도 같은 감동을 전해줄 것이다. 어느 건축가가 쓴 몇 줄의 글이 내 인생의 좌우명이 될 수 있듯이, 우리가 만들어가는 장소와 공간은 알 수 없는 어느 사람의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자리잡고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도시의 모습은 혹시 우리를 닮아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우리가 계획하고 지어지는 건축물들은 도시의 풍경과 환경에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지 되돌아 봐야 하지 않을까? 그 안에서 사람들은 태어나고 먹고 일하고 잠을 이루며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나 하나의 힘으로 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핑계보다 나 하나라도 변화를 시작해야 할 때이다. 건축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성현군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몇몇 사람은 우리건축의 미래에 밀알이 되어 새로운 장을 열어가는 선두주자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지울 수가 없다.
글 / 박준호(반디불 환경계획연구소) c3korea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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