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tecture and Design
몇 일전 또 한 번의 학생 졸업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 저녁에 동료 선생님들과 술 한 잔으로 달랬다. 저녁 내내 이대로 가서는 이 나라 건축은 안 된다는 대화를 시작으로 현상공모는 이래서 안 되고, 건축교육은 이래서 안 되며, 건축제도나 법규도 이래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로 술잔을 가득 채우고 또 채웠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더욱이 많은 등록금을 내고도 저렇게 준비 안 된 상태로 졸업해서 떠나는 우리 학생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푸념으로 오랜만에 사무실 문을 잠그고 식구들과 해운대로 출발하였다. 오래간만에 어릴 때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보기 싫은 해변가의 빌딩들을 피해 비치호텔 근처의 동백섬으로 발길을 돌렸다. 헌데 여기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준비를 위한 공사관계로 출입금지란다. 설마 동백섬에 건물을? 그 많은 해운대의 호텔들로 부족해서? 어느 날 여의도에는 족보도 없는 형태의 건물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상징하듯 세워지더니, 이제 밤섬엔 오페라하우스 현상공모로 건물을 짓는다 하고, 그 다음은 동백섬. 게다가 얼마 남지 않은 해운대의 송림까지 곧 주차장으로 변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다음은 행주산성 차례인가? 이 나라에도 건축을 하기 위한 온갖 시스템은 다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무슨 자문위원, 무슨 심의위원회, 무슨 협회. 이 나라의 위정자들은 다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들 주위에는 그만한 조언조차 건넬만한 건축가들이 없는 것일까? 아님 바로 그들이 위정자들을 부추겼을까? 그것도 아니면 권력과 돈 앞에 예스맨으로 전락한 것일까?
적어도 내가 대학을 다닐 때에는 선배들에 의해 건축에 있어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보겠노라고 한국적 건축이라는 바람이 분 적이 있었다. 비록 그 결과가 무식이 장독 깨는 정도기는 했지만. 어쨌든 건축 바깥의 세상에서 몇 번의 민주화 바람이 불고 지나간 사이, 유학을 갔다가 돌아와 우리의 도시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아파트 숲이 미아리 고개를 가리더니 죽전, 분당의 아파트 파사드가 전원의 실루엣을 대신하게 되었고 점차 우리의 도시하늘은 좁아져 버렸다. 신도시라 하며 최첨단 주거단지라고 광고하는 가장 최근에 조성된 그 거리에서조차 과연 저 건축물들은 어느 나라 사람, 어느 나라 건축가에 의해 지어졌는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설마 내가 가르친 학생들이? 우리 동료들이? 아니면 멋있는 자동차에 폼 나는 선배들이? 아니면 그들도 돈 앞에는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일까?
어쩌면 이는 닭이 먼저인지 계란이 먼저인지를 따지는 것과 같다. 누가 저렇게 볼 쌍 사나운 건축을 했는지를 따지기 이전에, 저들이 왜 저런 건축을 하게 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결국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결론이다. 이미 기존의 시스템으로는 그 결과가 어떠할지 벌써 우리 주변에 널려있지 않는가. 요즈음 대두되는 건축과의 시스템이 5년제이건 6년제이건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4년 공부를 한두 해 늘려서 한다고 해결책이 될까? 운전면허 시험의 형태를 가지고 대학 4년 교육의 잣대로 삼았으니 공교육을 주장하면서도 그 교육을 믿지 못할 수밖에. 기사시험제도를 만들면 뭐하겠는가. 소위 전문가인 건축가 시험 뿐만 아니라 건축직 공무원 시험에도 마찬가지로 되풀이 될 뿐인 것을. 학생들 등록금으로 유지되는 우리 교육의 현실 속에서, 사학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어 교육의 절대치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졸업을 시키고, 그렇게 졸업한 그들은 학원을 전전해가며 기사가 되고 건축사도 된다. 그렇게 건축도 하고, 그렇게 그들만의 현상공모도 한다. 국가는 당신들이 그렇게밖에 공부 안 했으니 하며 나 몰라라 하고…….
우리의 건축 시스템이나 법은 분명 발주자, 시공자, 건축가의 삼각구도의 전제로 만들어져 있다. 따라서 건설사의 네임이 건물의 주소지명이 되어버렸다면, 이는 분명 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운영의 방법이 잘못된 것이다. 그들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건축가들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또 누가 그들을 그렇게 벼랑 끝으로 떠미는 것인가? 내가 아는 우리나라의 시공비 또한 더 이상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 10대 기업 중에 건설회사 없는 그룹이 어디 있는가? 비참할 정도의 설계비를 받고 설계하는 설계사들. 그룹 회장님들은 오늘도 좋은 차 속에서 과연 건축의 공공성이 어떤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기는 하는 것일까? 오늘날 현실적인 시공비 분양가에서 과연 언제까지 ‘저렴한 공급비에 많은 수혜자’라는 구호로 소비자를 우롱할 것인가. 행정 관계자님들은 언제까지 시공자에 의한 설계발주를 수수방관할 것인가.
그나마 이름 있는 외국건축가를 초대하여 자신의 소장품 박물관을 멋지게 지었다는 어느 그룹 회장님께는 감사할 따름이지만, 지금 자신의 그룹이름으로 지어지는 아파트 단지의 설계비가 얼마인지는 아십니까? 그 설계들은 과연 어떻게 채택되어 어떠한 과정과 어떤 건축가들이 선정된 것인가요? 우리 국민들이 사는 아파트는 그저 기능공들이 설계하면 되는 것인지요? 물론 그 그룹 회장님의 문화 사업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도 남다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외국건축가들의 설계비 1/3로도 그 3배의 건축적 질을 보여 줄 수 있을 건축가들이 이 나라에 즐비하다는 것은 과연 알고 계신지.
건축의 왜곡된 시장, 왜곡된 행정, 왜곡된 문화. 나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러한 세상의 왜곡을 바꿀 수 있는 첫걸음은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건축과 architect를 건축공학과 engineering와 분리하는 것도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 전문성을 구분하여 일관되고 왜곡되지 않는 교육을 통해 우리는 한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 그렇게 길러진 전문가들에게 그 다음의 문제를 맡겨야 한다. 소위 그 분야의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상황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살아가야 하는 현실을 더 이상 참고 지켜보기가 역겹다. 왜곡된 제도로는 기능공 같은 건축가를 양성하는 이상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오죽하면 ‘건축디자인과’라는 해괴한 학과가 전국에 탄생하였을까? 어떠한 건축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건축’을 ‘디자인’이라고 하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많은 설명에 입이 아플 것 같아 앙리 시리아니의 다음의 표현을 빌리겠다.
아무리 여러 번 강조해서 말해도 건축 상업적 광고 이미지와 아무 상관관계가 없다. 이런 광고 이미지 같은 건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상업적 마케팅 차원에서 순전히 ‘팔기’ 위한, 소위 ‘디자인’이라 불리는 것으로, 그런 것을 추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건축을 퇴색시키고 있다. 건축이란 ‘빛’에 의한 시간의 표현이다. 이러한 빛이 없다면, 우리는 동시대에 반드시 있어 주어야 되고 존중되어야 할 것들을 우롱한 채, 소위 ‘디자인’이라는 상업적 행위만을 하는 것이다. 다시 건축에서의 ‘이미지’라는 대목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해보자. 먼저 물리적인 측면에서의 건축이란 중력의 표현이다. 이집트인들의 피라밋에서 중력이라는 경험을 하면서 그 순수함에 우리는 현기증을 느낀다. 혹은 라 데팡스의 그랜드 아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음으로 사회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오늘날 건축가는 ‘선물로서의 건축’을 하기 위해 초청된 사람이다. 물론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반대되는 선물이겠지만.
모두가 훌륭한 공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확장된 공간이다. 또한 그것은 꽁꽁 둘러싸는 것에 대해 대응하는 것이다. 건축가로서 나의 인생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가득하였다. 꽉 둘러싸임을 피하기 위해 어떻게 한 공간을 닫을 것인가? 공간에 어떤 신분을 줄 것인가? 동시에 모든 것이 열려 있는 채로 둘 것인가?
오늘날의 제도, 특히 교육 등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 내가 아는 한, 오늘날의 제도는 사무실 등으로 이루어진 건물들이나 주워 모으고 있다. 나는 사회 시설을 어떻게 하는지 시범적으로 보여주고 싶다. 그것은 아마도 창문 - 사무실건축 같은 것에 있는 더러운 창 - 이 없이 고안된 것, 그러면서 빛이나 조망이 무시되지 않는 그러한 건축이다. 박물관이라는 것은 불투명에 의해서 구분되어지는 건축이다. 이것은 곧 역설적이겠지만, 건축에 있어 빛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스템을 찾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은 건축가에게 수많은 시간과 심사숙고를 맹목적으로 요구한다. 또한 시간과 공간처럼 너그러움도 있어야 한다. 우리 건축가들은 사회에서 그 누구보다도 우리의 모든 시간을 투자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 건축가들이 마치 시대의 첨병 같은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 앙리 시리아니
글 / 진영주(사람과 건축) c3korea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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