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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Space/Text

건축단상_상상력의 계획

Planning Imagination

 

근래에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움직이는 동력은 상상력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래서 예술가들의 놀라운 조형이나 메시지를 훌륭한 상상력의 표본으로 거론하며 그 새로움에 많은 관심과 연구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기괴한 이미지, 신기한 트릭, 새로운 방법론, 놀라운 해석 등등…….


물론 이런 새로운 물결에 딴지를 걸고픈 생각은 없다. 분명 상상력은 21세기를 끌어나갈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며 변화의 엔진이기 때문이다. 단지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상상력이라는 엔진을 돌리는 치밀한 논리와 체계적인 방법론이 상상의 이미지 뒤에 가려 어지간한 노력 없이는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1989년,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기념해서 파리의 세느 강을 붉게 물들인 오십만 개의 풍선이 연출한 놀라운 광경을 떠올려보자. 의심할 여지없이 놀라운 상상력의 기획 아래, 붉은 피를 상징하는 이 풍선들은 수 시간 세느 강을 부유해 흘러내려오다가 에펠 탑에 이르러 하늘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이미지가 연출될 수 있었을까?


그 비밀의 처방은 이러했다. 사전에 헬륨 풍선들에 달아둔 소금덩어리가 강을 흐르는 중에 서서히 녹아 내려 에펠 탑 근처에 다다르는 시점에는 헬륨 풍선의 부양력이 소금덩어리의 중력을 이기게 되는 것이다. 이 시나리오를 위해서 이벤트를 준비한 사람들은 무엇을 했을까? 틀림없이 풍선이 부유하기 시작하는 지점에서부터 에펠 탑까지의 부유 거리를 측정하고, 소금이 녹아 내리는 속도를 계산해서 예정지점에서 떠오르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소금 질량이 필요한지를 구해냈을 것이다.


이렇듯 훌륭한 이미지의 구현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체계적인 계획이 요구된다. 그래서 필자는 상상력의 외면에 앞서 먼저 상상력의 이면, 즉 치밀한 계획의 과정을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더불어 상상력의 외면과 이면 사이의 긴장관계에 의해, 상상력도 그려지고, 만들어지고, 지어진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계획을 하다 보면 직관적 이미지와 객관적 제약조건 사이에서 방황하게 되는 일이 잦다. 그럴듯한 상상에 빠지다 보면 법규를 비롯한 현실적인 요구조건이나 실시계획과 같은 구체적인 현실화 방안을 뒷전으로 미루기가 쉬어지고, 반대로 너무 구체적인 제약조건을 따지다 보면 창의적인 이미지를 놓치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막연한 조건으로부터 상상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조건들을 창의적인 관점을 가지고 분석하고 연구해서 새로운 공간 이미지를 유도해내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실제로 구체적인 조건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는 순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확보되기 마련이다. 예컨대, 설비나 구조, 혹은 제도적/법규적 인허가 프로세스는 종종 건축적으로 완결된 이미지를 훼손하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그려지거나 단지 건물이 실제적으로 완결되기 위해 따라붙어 주어야 할 항목으로 간주되곤 한다. 이 같은 제반 사항들을 새로운 공간을 생산하는 밑거름으로 사용할 수는 없을까?


구조 및 설비 분야의 오브아룹 OveArup과 같은 회사가 건축설계분야에 미친 영향력을 떠올려 본다면, 광범위한 영역에 있어서 정례화되어 있는 기술적 요소를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함으로써 일상적 공간을 재해석하고 재창조할 수 있는 여지를 적잖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진다. 마찬가지로 제도적·법규적 프로세스나 문화적·행태적 특성에 대한 연구도 중요한 밑거름이 아닐 수 없다. “사용자는 어떻게 해당 공간을 점유하는가”, “제도적 특징이나 법규적 제약은 어떠한가”, “시대가 변하면서 특정 프로그램은 어떻게 이용되고 해석되어왔는가” 등등 광범위한 영역이 변화를 위한 그 구체적 조건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일반적인 의미의 상황 situation이라는 개념과 이미 전후의 변화를 가정하고 있는 조건condition이라는 개념은 구별되어 쓰여야 할 것 같다. 전자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면 후자는 새로움을 생산하는 혹은 변화를 유도하는 초기설정 상태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디자인에서부터 환경디자인까지 그 디자인 업역을 지속적으로 확대해나가고 있는 디자인회사 IDEO에서는 상점, 학교, 병원 등의 시설 내부공간 디자인을 통해 철저한 사용자 행태조사와 분석, 그리고 이에 뒤따른 참신한 아이디어의 구체화 과정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혁신innovation과 상상력이란 철저한 현실 조건의 이해를 토대로 새롭게 규정된 차이를 생산해내는 일련의 프로세스가 아니겠는가!

 

현실의 구체적 이해와 그로부터 새롭게 혹은 조직적으로 규정되는 조건, 그리고 이 조건들로부터 유도되는 새로운 차이difference……. 어쩐지 낯설지만은 않은 이 프로세스에 적당한 용어가 하나 있기는 하다. 프로토타이핑prototyping. 필자가 즐겨 사용하는 말 중에 프로토타입prototype이라는 용어가 있다. 말 그대로 타입 이전의 것으로서의 실험적인 공간조직방식을 일컫는 용어다. 예컨대 박물관, 도서관, 상점 등의 공간 타입 이전에 구체적인 행위와 조건들로부터 새로운 타입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공항에 위치한 박물관은 어떨까? 만화책을 거실에서처럼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공공 도서관은 없을까? 쇼핑몰과 결합된 교육기관은 어떨까? 물론, 앞서의 프로세스에서 말했듯이 이런 물음에 앞서 각각의 프로그램들을 실제로 사용하는 우리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구체적 연구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런 실험들에 있어서 실패를 두려워하거나 실패의 부가가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마치 중세의 연금술사가 금을 만들기 위한 실험의 실패를 통해서, 물질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더불어 예기치 않았던 새로운 금속들을 얻어냈던 것과 같이, 상상력은 변화를 꿈꾸는 실험의 원동력인 동시에 실패와 실험으로부터 축적된 경험과 지식을 현실의 혁신innovation으로 변이시키는 힘이기 때문이다.


“일찍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주 실패해야 한다.”는 격언이 있다. 이 짧은 말이 함축하고 있듯이 새로움을 꿈꾸는 실험은 실패를 프로세스의 일부로 끌어안아야 하지 않을까? 아마 그러기 위해서는 성공이든 실패건 간에 자기 자신의 로그북logbook을 꾸준히 작성해 나갈 필요가 있다. 무엇을 통해 어떤 점을 배웠는가? 어떤 것은 성공하고 왜 다른 것은 성공할 수 없었는가? 프로세스를 단축하려면 어떤 경로들이 있을 수 있는가? 등등 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만들어갔으면 한다.

 

미로를 빠져 나오려면 이리저리로 방황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런 방황들이 모여 형성된 하나의 탈주로가 우리들 정신의 지도 위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의 지도 위에서도 구축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그 탈주로가 그려질 때만이 단편적이었던 과거의 방황들이 현재의 탈주와 미래의 위기관리로까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항해지도를 얻게 될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유엔 스튜디오UN Studio의 벤 반 버클Ben van Berkel은 건축적 상상력이란 효용utility과 철학philosophy의 조합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가 이미 정확한 항해지도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상상력에 있어서 이들 양자를 통합하고 상생의 관계를 지속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적인 일이라고 주장한 이 사람이 그 기밀의 항해지도를 얻기 위해 요구되는 긴 시간의 로그북에 관해 썼던 다음의 글로써 상상력의 양면성에 관한 단상을 마무리한다.

 

“호기심을 가져라. 항상 ‘너는 우리를 위한 아이디어가 있니?’라고 물어라. 다른 철학들에 그리고 환상과 놀이, 실험들에 관심을 기울여라. 현실을 확장하고 심화하라. 풍부해져라. 작업이 보다 좋아지고 너 자신의 생각으로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휘저어라. 무엇보다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고, 모든 기술과 효과 그리고 아이디어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조합 모델을 발전시켜라.”

글 / 신승수(아름건축) c3korea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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