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시대를 가로지르는…?
늦은 10월 아침 7시, 양각도 호텔 40층은 출렁이는 구름 위에 떠있었다. 그리고 점점 도시의 윤곽이 드러났다. 급기야는 강변의 숲과 그 그림자마저 볼 수 있었다. 오랜 시간 확인하고자 했던 그 모습들이었다. 남쪽의 도시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녹지를 가진, 수많은 상징으로 이루어진, 그리고 백지 위에 그려진 사회주의적 ‘배치의 도시’, ‘존재의 도시’였다. 관찰은 쉬었으나 해석의 무거움이 압박을 해왔다. 다음날 묘향산의 아침은 서쪽으로 난 창문으로 들어왔다. 그저 설악동의 아침처럼, 어디와 다를 바 없는 익숙한 경치. 가을 산의 색깔들이 엷은 빛 속에 점점 분명해졌다. 하루 내 산을 오르며 지금 어느 산 어느 골짜기를 걷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곳에 있는 자신과 주위의 모든 것들 사이에 지금 어떤 특별한 그 무엇이 만들어져야 할 터이지만 그날 그곳에서는 그러하지 못했다. 경관은 있었겠지만 나와 관계를 맺어 의미로 다가오는 풍경은 없었다. 가는 곳 어디마다 좌판에 놓여 있었던 공훈화가의 풍경화들이 나의 의식을 방해했다. 갑작스러웠던 짧은 체험으로 풍경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이 여행 내내 그 단어를 마음에 담고 지냈던 탓이다. 그리고 이야기되듯 정말로 ‘풍경scape’이 그곳에 그리 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곳에 있음으로 있는 것인지, 다시 말해 나에 의해 구성되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하며 지냈던 며칠이었기 때문이다.
인도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인류학자 아파두라이Arjun Appadurai는 「고삐 풀린 현대성Modernity at Large」이란 책을 통해 현재 적지 않게 비난받고 있는 세계화라는 이슈에 대하여 오히려 그 흐름이 만들어내는 문화적인 역동성을 꽤나 긍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런 흐름을 아파두라이는 에스노, 미디어, 테크노, 파이낸스 그리고 이데오에 스케이프라는 접미사를 붙여 다섯 가지의 ‘풍경’으로 제시한다. 즉,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는 사람, 이미지와 정보, 기술, 자본, 이념들이 끊임없이 국경을 뛰어넘어 이동하면서 문화적 역동성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현대성에 관한 그 이야기들 또한 흥미 있었지만 기억에 먼저 담겼던 것은 스케이프라는 단어의 용법과 번역어인 ‘풍경’이었다. 수많은 접미사 ‘-scape’들에 적지 않은 궁금함을 가지고 있었던 차에 말이다. 그의 설명으로는 ‘-scape’란 종족, 매체, 기술, 자본, 이념이 가지는 고정적이고 초시간적인 측면을 제거하고, 세부적인 요소들의 집합이 비 규칙적이며 유동적인 모습으로 존재함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결국 ‘-scape’를 공통의 접미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 앞의 접두어에 대해 그것들이 매우 불확정적인 동시에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상황을 드러내고자 하는 위치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갑자기 ‘-scape’가 정말 풍경과 상사(相似)되는지, 아니면 적절한 용어를 가지지 못한 채 그냥 ‘-scape’로 사용되어야 하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당연히 사전에서는 그렇게 지시하고 있으리라. 특히 landscape - 독일어 landschaft에 어원을 가진 - 등의 이야기로 말이다. 궁금한 것은 그것 ‘-scape’가 왜 오늘날 아파두라이의 용법을 포함하여 데이터, 어번, 쏘시오 등등의 접미사로 빈번히 출현하고 있는가 하는 점과 그것들이 그냥 ‘풍경(또는 경치, 경관)’으로 이해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점이었다.
바로크 시대 프랑스 화가 클로드 로렝의 그림이 있다. 구불구불한 작은 길과 불규칙한 수목 배치, 무계획적으로 보이는 호수나 개천 속에 아주 오랜 건축물의 폐허가 있다. 마치 ‘계획된 불규칙성’을 통해서 자연 그 자체를 보여주려 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계획된 자연’이다. 건축물은 그리스이고 로마였다. 그림은 여행을 낳았고 여행을 통해 새로운 자연과 건축 그리고 경관을 확인한 영국의 귀족들은 그것을 그들의 정원으로 옮겼다. 영국식 정원English landscape의 시작이며 스토우헤드가 대표적이다. 심지어는 일부러 멀쩡한 폐허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래서 영어 ‘landscape’의 의미 속에 ‘풍경’과 ‘풍경화’의 뜻이 함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르네상스의 회화 속에서 소위 관찰자의 시점이라는 자리가 획득된 상황에 힘입은 것이라 한다. 대상이 망막에 맺히는 물리적인 상 속에는 무수히 많은 요소들이 들어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의 합을 그냥 ‘-scape’라 부르지는 않는다.
‘-scape’는 관찰자가 외계의 시각 상을 그냥 객관적으로 인식한 모든 것이 아니라 그것들 가운데에서 그에 의해 재구성된, 새로운 계열로 조합된 어떤 것이다. 그러기에 지독한 문화적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단어가 왜 오늘에 빈번히 출현하는가에 대해 여러 사람에게 물어도 대답이 시원치 않다. 무리지만 그 힌트를 아파두라이의 ‘현대’에 대한 관점에서 얻게 되었다. 결국 그 말 자체가 지극히 현대에 어울리는 용법이자 관점이 아닌가 하는 점에서이다. 현대 사회란 보이는 것들, 요소들은 넘치고 해석은 멀다. 로렝의 그림은 화폭 속에 분명했고 만들어진 정원 또한 분명하게 조합된 ‘-scape’를 만들었으나 알고 보면 그 정원에는 원하는 시점 외에 무수히 많은 분산된 시점의 가능성들이 함께 있다. 위치를 조금만 옮겨도 중심은 사라진다. 기술과 자본, 그리고 이념 등등의 잣대를 들이대야만 부분적으로 드러나며 그것을 통해 가능한 것은 ‘가로지르기’일 뿐이다. 하면 각각의 접두사들이 붙은 ‘-scape’들은 또 다른 현대 사회의 ‘modern scape’다. 확정짓기 어려운 차이들을 횡단하며 그것들이 생성하는 그 무엇에 대한 문화적 기대가 접미사 ‘-scape’들을 생산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 흔한 ‘-scape’들이 일정한 논의에 도달할 수 있으려면 어떤 분명한 의지를 내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 ‘-scape’란 객관적으로 인식되는 모든 것들의 합이 아니라 그것들 중 나의 위치에서 의미가 있는 것들이 재조합되는 문화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겸재 정선은 말할 나위 없이 이 나라 진경시대의 중심인물이다. 선필들의 훈도와 규칙을 답습하던 화풍을 자신의 눈으로 읽어내고 자신의 뜻으로 구성되는 진경산수화를 개척하였다. 그러하니 그의 그림 속에는 우리들 주변의 실제 풍경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것들은 겸재의 의지에 따라 겸재의 방법으로 옮겨지고 표현된 것들이다. 그의 그림 속에는 또 우리들 자신과 같은 인물들이 노닐고 있다. 헌데 그들은 단지 우리 자신들로서 그림의 일부로 놓여있는 것일 뿐 아니라 겸재에 의해 배치된 그림 감상의 안내인들이다. 그들의 눈길과 손끝에 겸재가 이끄는 감상의 순서와 강약이 주어져 있다. 진경(眞境)인 동시에 겸재가 내린 해석의 총체인 것이다. 실경으로서의 강도는 공훈화가들의 그것이 훨씬 더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뿐이다.
‘-scape’가 ‘풍경’으로 이해되는 것은 애초에 문제 삼을 일도 아니었다. 다만 오늘 그 말은 그 말을 내어뱉는 의지에 따라 가치가 있음을, 아니 본시 의지로 구성되는 것임을 확인했을 뿐이다. 그리고 동시에 ‘풍경(-scape)’이 자신의 위치에서 새롭게 선택되고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뻔한 사실을 다짐했을 뿐이다. 도시에서나 전원에서나 더욱 깊숙한 산하에서나. 묘향산이 채 다가오지 못했던 것은 공훈화가의 그림 탓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그곳에서 구성해 낼, 풍경을 보는 안목의 부족함 탓이었다. 안개가 걷히며 드러난 평양이 해석의 무거움을 갖다 준 것은 사회주의 계획도시에 겹쳐지지 않는 남쪽 도시들의 지독한 ‘-scape’들이었다. 어느 기자가 말했다. 이들 사이의 ‘황금율’은 없는가 라고.
떠나는 날 아침 7시, 양각도 호텔 40층은 출렁이는 구름 위에 또 떠있었다. 대동강 한가운데 강물이 갈라지는 곳에서 평양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희미한 하늘빛이 있었다. 분명 해는 떠있을 시간이었다. 아마도 저 구름바다 속에 있을 터이다. 덕분에 구름은 묘한 빛을 살짝 내비치며 계속 출렁이고 있었다. 여러 무리의 새들이 그 빛깔 위를 검은 색으로만 날아다녔다. 안개였을지도 몰랐다. 11월로 넘어가는 대동강은 아침마다 자주 안개 속에 싸인다 했다. 반시간이 지나 대성산성 방향으로 붉은 해를 잠깐 보았다. 이내 하늘도, 해도 다시 보고 싶었던 모든 것들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글 / 이종호(스튜디오 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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