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치 않은 언어들 Ⅸ_한국성(Koreaness)
확실치 않은 언어이기 보다는 배경과 목표에 맴돌이를 반복하는…….
21세기의 초입에서도 자신을 향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사회가 있다. 또 어떤 다른 사회나 국가가 지금 그와 같은지 나는 알지 못한다. 계간 「역사비평」 여름호는 새로운 세기의 사구체론사회구성체론을 이슈로 내걸었다. 80년대의 사구체 논쟁은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에 대한 엄밀한 분석을 통해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밝히겠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출발하였다. 각 학문의 개별영역을 뛰어넘어서 진행된 이 논쟁은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한국사회의 정치지형의 변화 그리고 각종의 탈근대 논의가 수입되면서 이 논쟁에 대한 잠정적인 결론도 생산하지 못한 채 종결되었다. 그 끝 지점에 IMF의 위기가 있었고 우리의 체제는 많은 부분들에서 빗장이 풀어지게 되었다. 그에 따르는 많은 변화들에 대해 고민이 계속되었다. 위기 이후 8년, 고민은 여전하지만 이 사회를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어떤 이론적 틀은 아직 제공되지 못하고 있다. 대신 그것의 결과는 지역운동, 여성운동, 동아시아담론 등과 같은 다원적이며 다양성을 존중하려는 운동들에 대한 논의를 만개시켰다. 이참에 「역사비평」은 사구체론의 불씨를 다시 지피려는 의의에 대해 “사회구성체론과 같은 거대 담론이 과도한 것도 문제지만, (요즘처럼) 과소한 것도 문제”이며 “사구체론의 복원을 통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모색”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알렌 뚜렌이 지적하는 현대성의 특질 - 현대성이란 터무니없이 커다란 전체와 끊임없이 분화된 개인 사이의 텅 빈 곳 - 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이러한 견해가 어떠한 지형 속에서 계속되어 나갈지 아니면 이미 분화된 개별성 속에 묻힐지는 짐작되기 어렵다. 다만 그와 같은 욕구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을 되묻는 사회는 희귀하나 건강하다. 이러한 상황은 길게는 이 사회가 가진 역사 속에서의 근본주의적 치열함에 기인될 것이고 짧게는 그 역사의 끝에서 아직 해결되지 못한 분단체제의 긴장감으로부터 기인될 것이다. 어느 것이라도 좋다. 나는 그러한 긴장감 속에 놓인 이 사회가 좋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생산되는 논의들이 더 넓은 세계 속에서 보편적인 가치를 획득하는 장면까지 기대를 걸 수 있기에 즐겁다.
지금쯤 그래서 어찌되었다는 말이냐 라는 질문이 틀림없이 나오게 되리라. 건축 그거 그냥 좀 잘 해버리면 되지 않겠는가 라는 말도 종종 들린다. 더 오랜 말 중에는 이 나라 건축에서의 시급한 문제는 ‘기본적인 질’을 확보하는 것이라는 표현도 있었다. 정말 그런가? 빨리 표현해 버린다면 그건 그렇지 않다. 두 견해 모두 다 역사에 대한 몰이해이며, 이 세상을 겪어 나가는 와중에서의 온갖 가치 판단을 위한 노력들에 대한 모독이다. 한 걸음 더 나가면 아직도 벗어버리지 못한 식민성이다. ‘잘’이라는 말의 기준은 어디에 있으며 ‘기본적 질’의 기준 또한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마도 발언자의 마음 속에는 바다 건너 어디에서 묻혀왔던 그 어떤 기준들일 것이다. 인문학의 탈 식민 논의가 이미 십년을 넘고 있는데. 그러기에 질문(?)의 답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치열한 고민들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각성을 좀 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한국성’ 논의의 핵심이 바로 그곳에 있다는 점이다.
골치 아픈 ‘전체사회’의 문제를 보류하고 ‘건축계’의 상황을 보자. 이 나라 최고의 문화재벌은 명품을 수집하듯 건축가를 수집하여 달동네 형 미술관을 만들었다. 특별시는 해괴한 방법의 현상설계를 진행하면서 정치적인 목적을 꾀하려 하고 있다. 세운상가, 노들섬 그리고 새로운 시청사 모두 그러하다. 아니 벌써 이미 대형 설계 조직들은 자발적인 디자인 중개상들이 된지 오래다. 예민한 건축가들 중 일부에서도 여러 이유에서 그와 같은 ‘활용’을 유효하게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이 모든 상황들의 밑바닥에는 개방과 교류의 가치를 내세우면서 아직도 극복되지 못하는 식민성의 찌꺼기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것인가? 지적을 피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건축인 스스로가 그 상황 속에서 주체적인 역할이냐 아니냐의 여부에 달려있을 뿐이다.
‘한국성’의 논의는 비단 건축으로만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건축으로 이야기될 때의 과제 또한 더 넓은 사회적 과정에 대한 인식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사회적 과정에 대한 인식이란 바로 역사에 대한 인식과 겹쳐진다. 역사에 대한 인식은 지식의 차원을 넘어서야 하는 동시에 그 인식의 획득 방법에 관한 더 깊은 논의를 불러오게 된다. 많은 탐구는 필수적이되 그것들의 결과는 ‘지금 여기’에서의 의미를 얻게 되느냐에 의해 승인의 여부가 달려있다. 그러한 점에서 과거 ‘전통’이라는 이름을 가진 논의로부터 ‘한국성’의 논의로 전환된 것은 그나마의 진전이라 여긴다. 그것은 ‘한국성’이라는 변화된 어휘 속에는 그 이전 보다 더욱 ‘지금 여기’의 의미가 듬뿍 담겨있기 때문이다. 좀 더 솔직해보자. 이 나라가 이 세상의 중심에 놓여 있다면 ‘한국성’의 논의는 무의미 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한국성’ 논의의 전제는 그러한 관심과 생산과 주장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유효하다 말할 수 있다. 동시에 그러한 때란 우리가 충분히 우리의 눈과 의식으로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으며, 이미 논의와 실천의 좋은 순환구조 속에 들어가 있을 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지 않은가? 아직도 간단없이 새로운 논의들이 우리에게 뿌려지고 있으며, 이 사회 안에서의 논의는 ‘지금 여기’의 유효함보다는 어딘가 중심을 향해 승인되기를 끊임없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과제는 그러한 ‘때’에 도달하기 위한 우리의 여정이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될 수 있느냐 하는 점에 놓여있다.
시작하는 방법에 관하여 여러 기회마다 추체험(追體險)의 과정을 말했다. 다시 말하자면 추체험이란 어떤 역사적 상황 속에서 역사적 행위자가 어떤 역사적 행위를 수행하였다고 했을 때, 그 행위와 관련된 증거에 입각하여 자신의 정신 속에서 그 역사적 행위를 수행하기 위하여 행한 의사결정의 사고과정을 비판적으로 재사고하며 상상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 역사적 행위를 재인식하는 활동을 말한다. 그러기에 추체험은 잘 정리된 역사적 지식을 습득하거나 부지런한 답사를 통해 대상을 그저 체화시키거나 전해지는 기예를 재현해 내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이루었던 사고를 오늘의 의미로 재사고하는 활동을 말한다. 그것은 결국 지식과 몸의 방법에 더해 역사적 상황에 대한 상상적인 재구성의 과정을 ‘지금 여기’의 상황 속에서 재현해 내는 작업을 말하는 것이다. 동시에 재현의 가치는 ‘지금 여기’에서의, 리얼 - 리얼리티real-reality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의미를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
추체험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출발점과 함께 ‘한국성’의 또 다른 출발점은 이 나라 도시의 ‘지금 여기’를 살피는데 있다. 그것 속에는 그것을 이룬 모든 역사적·사회적 과정이 필연과 우연으로 담겨있다. 그리고 그것 속에는 아주 많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부정합의 결과들이 드러난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우리의 현재가 가지고 있는 삶의 내용들과 형식들 사이의 균열들이다. 균열의 모습들이 곧 치유의 대상들은 아니다. 균열의 동역학이 바로 우리 도시의 정체성으로 전화(轉化)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살펴나가야 한다. 전자를 학습의 과정으로 본다면 후자는 실천의 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
‘한국성’논의의 남는 과제는 그것을 역사적 과정을 공유하는 아시아의 도시와 건축이 가질 수 있는 보편성으로 만드는 일이다. 동시에 더 넓은 세계의 다양성으로 만드는 일이다. 우리의 현재란 모든 세계와 함께 겪고 있는 현대성 극복의 과제와 아시아의 도시들이 특별히 가진, 아시아 역사 속의 근대성을 극복해야 하는 두 가지 과제를 함께 갖고 있다. 세상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가치 있는 이슈는 두 과제 어디쯤에서야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감지된다. 우리가 겪어온 근대의 역사와 그 속에서 드러내놓게 된 도시의 역사 속에서 충분히 그러하다. 매끄럽게 봉합된 도시가 아니라 곳곳에 균열의 틈들이 있고 그 속에 새로운 잠재력이 숨어있어 그것이 발현되고 교환되는 그런 도시와 그 속에서의 건축 말이다.
글 / 이종호(스튜디오 메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