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치 않은 언어들 Ⅱ_컨셉(Concept)
네 작업의 개념은 무어냐?’라는 말이 부르는 생각들.
개념concept이라는 말 또한 우리 주변에서 아주 쉽게, 그리고 또 흔히 쓰이는 말이다. 그 과제를 그 결과로 이끌어 온 나의 주된 생각은 이러하다 또는 너의 주된 생각이 무엇이냐 라는 답변과 질문인 듯 사용되고 있다. 복잡한 과제를 풀어내기도 어려운데 그것을 풀어낸 어떤 주요한 생각을 말과 글로, 그것도 필살의 용어나 문구로 풀어내야 하는 일종의 압력이라도 있는 듯하다. 하지만 소위 개념이라는 것이 과연 작업 과정 중에 있기는 있었던가 싶기도 하고 때로는 슬쩍 근사한 합리화justification를 위해 골머리를 썩이기도 한다. 잡지에 실리는 작업을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한 고민과 현상설계의 설명서를 써 나가기 위해서 벌어지는 현장의 고민들이 있고, 과제를 설명해야 하는 학생으로서 학교에서의 고민이 있다. 때로 과제 초반에 개념부터 제시되기를 요구받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다음과 같은 어떤 원칙들이 확고히 존재하는 듯, 은근한 합의 아닌 합의가 있는 듯 개념이라는 말이 사용되어지곤 한다. 그것은 개념이란 ‘작업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 ‘작업보다 우선하는 것’, ‘작업의 전 과정을 지배하는 것’, ‘추상적이며 언어적이어야 하는 것’ 그리고 ‘언제나 새로워야 하는 것’ 등등의 암묵적 전제들이 아닌가 한다.
전통적인 논리학에서 개념은, 한 무리를 이루는 개개의 것들에서 공통적인 것을 빼내어 새로 만들어 낸 표상을 말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포유류를 척추동물들 중 어미의 뱃속에서 세상으로 나온 후 일정기간 어미의 젖으로 성장하는 동물들의 무리를 일컫는 말이라고 할 경우, 이러한 내용이 척추동물 중 그와 같은 공통적인 성질을 묶어내는 관념 - 관념은 아이디어idea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 이 되며 바로 그 포유류라는 것은 그 대상들에 대해 인간이 가지는 개념이 된다는 것이다. 더 엄밀하게는 낱낱의 사물에 대해 그것을 포괄하여 그것들로부터 한 단계 차원이 높은 추상적, 보편적 존재를 뜻한다고 한다. 건축으로 번안해 보자면 그 건축을 이루고 있는 어떤 공통적인 속성, 다시 말해 커다란 범주에서부터 상세에 이르기까지 그 작업에 투사한 정신들을 관념이라 부르고 그 결과 확보하게 된 체계적인 인식이 그 건축가가 가진 개념이라 말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 정도면 이 글을 시작할 별 이유는 없다. 그런데 현대의 논리학에 와서는 약간의 문제가 발생한다. ‘관념’의 지위가 흔들리는 것이다. 관념이 가진 심리적, 주관적인 특성 때문에 관념을 통한 개념의 설정이 의심되고 오히려 보다 객관화할 수 있는 성질들이 하나로 묶이면서 ‘집합’이 ‘개념’을 대체하는 보다 중립적인 용어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상의 용법에서 ‘너의 집합이 무엇이냐’라고는 쓰지 않는다. 일상의 용법에서 흔히 대상에 관해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을 하고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을 지닌다. 따라서 대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의 용어로 간주된다.
다른 한편 개념이란 말이 어떤 용어들과 짝을 이루며 사용되고 있는지 살펴보면, 이론theory과 명제proposition 등의 용어들이 개념과 함께 등장한다. 이론이란 무엇인가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예측하기 위한 일련의 상호연관된 명제들의 집합이며, 명제란 일련의 개념들 간의 관계란다. 그리고 또 개념이란 이론을 이루는 기본구성요소로서 특정한 의미를 부여받은 용어란다. 그렇다면 ‘네 작업의 개념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앞서 ‘네 작업의 이론은, 또는 명제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이 앞서야 되는 것인가? ‘이론’이라니. 우리는 때로 외부로부터의 질문이 있든 없든 자신의 작업이 하나의 이론으로 꿰뚫어지기를 바라고 있지 않은가. ‘관념’의 지위가 흔들려서 ‘개념’이 위태로운 것이 아니라 이론화 작업이라는 소망 속에서 이제는 그 ‘개념’ 자체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단지 내 머릿속에서)
그러던 차, 듀이John Dewey의 다음과 같은 말이 걸려든다.
“개념은 지적 도구(知的道具)이다. 사람은 환경에 대한 적응을 보다 유효화하기 위해 개념을 만들어 사용한다. 따라서 개념은 플라톤 이후의 많은 철학자들의 생각처럼 생활경험에서 유리된 불변의 것도 아니고 경험론자들의 생각처럼 외부로부터 주어진 수동적인 것도 아니다. … 개념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의 지침이 되어야 하고 끊임없이 그 행위의 결과에 의해 검토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 '도구주의Instrumentalism', 존 듀이
개념은 언제든 수정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수정되어야 하는 지적 도구라는 것이다. 도구라는 표현 속에 어떤 구속이 조금 해방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고백하건대 나 자신 역시 이제껏 개념, 원칙 그리고 요소라는 위계에 의해 구분되는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이야기를 추슬러 보자. 이 모든 장광설의 목적은 논리학 연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실천적인 작업 속에 어떠한 사고과정이 우리의 작업을 이끌어 갈 힘을 지니고 있으며, 어떠한 언어표현이 우리의 작업을 이해시킬 통로를 제시하는가에 관한 더듬거림인 것이다. 같은 의미로 상대편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 요구하는 언어 - 예를 들어 개념과 같은 - 가 정확히 표현되고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개념은 그 작업에 반드시 있어야 했거나 우선해 있었으며 작업의 전 과정을 지배해 왔던 것인가? 그리고 가능한 한 언제나 새로워야 하는 것이었던가? 아닐 것이다. 누구라도 한번쯤 건축에서의 그 복잡한 설계과정을 겪어 본 사람이라면 전개의 과정이 그리 쉽게 언어적, 추상적인 개념의 선택과 그에 따른 여러 단계의 선형적인 의사결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여러 해 전, 어느 지역의 건축 캠프에서 건축에서의 개념의 의미와 그 도출과정에 대한 생각을 말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요청의 주된 동기는 개념이라는 용어를 둘러싸고 학생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것이었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내 이야기의 제목은 ‘개념에서 가설로’라는 것이었다. 가령 과제에 대해 그 때까지의 인식을 바탕으로 가설을 세우고 그것으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고 그것에 대해 검증을 거치면서 필요한 조정을 거쳐 나가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권유의 말이었다. 또 한편 가설이란 작업의 어느 단계에서나, 어떤 동기에서나, 자신의 내부 또는 외부의 어떤 자극으로부터도 나올 수 있으며 단지 과제를 끌어 나갈 힘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좋다는 설명을 붙였다. 왜냐하면 지속적인 검증과 피드백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가설을 수립한다는 것은 언제나 충분한 용기를 내어 볼 일이라 말했다. 연이어 ‘설명되는’ 개념과 ‘생성되는’ 개념을 나누어 설명했다.
‘생성되는’ 개념은 작업을 전개시키는 지적 도구로써 작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검토되고 수정되어 나가는 것이다. 과학의 법칙도 처음에는 가설이었던 것이 실험과 증명에 의해 진화된 것이다. 가설은 이미 알고 있는 경험적인 진리나 개념에 의해 새로운 명제를 산출해 내는 것이므로 가설을 제기하고 검증해 나가는 작업이 바로 지극히 창조적인 과정인 것이다. 그에 비해 ‘설명되는’ 개념은 다른 이에게 대상을 읽어들어 갈 통로를 제시하는 도구로써 작용하는 것이다. 이미 여러 단계에 걸친 수정이 끝나 정리된 것이다. 그리고 그 작업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며 반드시 언어적이거나 새로워야 하는 것도 아니다. ‘설명되는’ 개념 중 간혹 함축적인 한 단어나 구 또는 짧은 절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것은 음악의 그것처럼 작업을 상징하는 표제로서 작용한다. 그 표제는 때로 작업자에게 ‘생성되었던’ 개념일 수도 있다. 그 둘의 일치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설명되는’ 개념이란 작업자가 관찰자에게 내미는 초대장과 같은 것이다. 초대장이 없다 해도 들어가는 통로는 각자에게 각자의 방법으로 발견되어지기 마련이다.
네 작업의 개념이 무엇이냐 라고 묻지 말자. 그냥 네 작업을 이끌어 온 생각이 무어냐고 물어보자. 조금 더 나아가 질문할 때는 너의 작은 가설들이 만들어져 검증되고 개념과 명제가 되어 그 작업의 전체적인 이론이 되었는가를 물어보자. 그런 작은 가설들이 어디에서 부딪혔으며 어떤 조정의 과정을 겪었는지 넌지시 물어보자. 말이 없다 하여도 감동을 일으키는 힘과 의미를 만들어내고 그 의미를 흐르게 하는 힘은, 언제나 누구라도 느껴 알 수 있다.
글/이종호(스튜디오 메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