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단상_현실을 현시하기
Presenting Reality
얼마 전에 진중권 씨의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휴머니스트, 2005」이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슴에 깊게 다가오는 글을 접할 수 있었다. 유쾌한 미학자라는 이 사람은 7가지 상상력 프로젝트라고 칭한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어두었다.
“디자인은 상상을 현실로 실현하는 그림이다. 그것은 다시 한 번 이미 있는 것을 반복하는 재현 (representation)이 아니라,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현실을 처음으로 있게 하는 현시 (presentation)다. 빌렘 플루서에 따르면 과거의 인간은 대상 object을 보고 그것을 머릿속의 표상, 책 속의 텍스트, 혹은 캔버스 위의 형상으로 재현하는 주체였다. 하지만 미래의 인간은 자신의 꿈을 앞으로 던져서 실현하는 기획이 될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많은 부분 동감할 수 있었던 것은, 건축설계야말로 상상을 현실로 실현하는 일이 어떤 디자인 영역에서보다도 어렵고도 절실하다는 생각과 프리젠테이션 과정에서 겪어온 많은 실패와 간헐적인 성공의 기억들이 너무도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마 건축설계를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공간을 도면이나 이미지로 현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드라마틱하거나 창의적인 공간을 꿈꾸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대부분의 건축사사무소들이 그러하듯, 제한적인 시간에 쫓겨가면서 개념도 있고 공간적으로도 우수한 디자인을 추구해갈라치면 매번의 프리젠테이션은 그야말로 프로젝트 생사의 갈림길이 된다. 아무리 좋은 공간이나 개념도 머릿속 밖으로 끄집어 놓지 못하면 그것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건축주는 말할 것도 없고 동료인들 설득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평범한 것을 깨뜨리려는 순간 프리젠테이션은 말 그대로 상상을 현실로 실현하는 매체가 아닐 수 없다. 선입견이나 진부함을 털고 새로운 모색을 가능케 하려면 그것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이 새로움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형상, 구조 및 조직은 어떻게 생겼는지, 새로움을 통해 무엇이 가능해지고 그 유무형의 파급효과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 새로움을 뒷받침하는 법적, 제도적, 문화적 근거는 어떤 것인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프리젠테이션, 즉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현실을 처음으로 있게끔 하는 현시가 반드시 필요하다.
새로움을 현시하기 위해 요구되는 앞서의 네 가지 주요항목은 프로토타입디자인 방법론을 이론화한 라울 분쇼튼(Raoul Bunchoten)이 규정한 네 가지 프로토타입 구성요소인 브랜딩, 토양, 흐름, 합체에 각각 대응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라울 분쇼튼이 정의하였듯이 프로토타입이 변화의 엔진이라면, 새로운 현실을 처음으로 있게 하는 행위인 프리젠테이션은 그 프로토타입이 드러나도록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프리젠테이션은 단지 멋진 투시도나 도면을 그리는 것, 혹은 건축주나 이해관계자들 앞에서 유창한 말솜씨를 구사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견고한 상상력을 만드는 일련의 표현행위와 상상을 현실에 연결하는 기술적인 교량작업을 포괄하는 미래로의 투사 혹은 기획과정 전체임을 강조하고 싶다.
요컨대 이미 있는 것을 반복하거나 복사하는 재현이 현실의 소비라면, 현시는 새로운 현실의 생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프리젠테이션은 유쾌한 미학자의 말마따나 아직 없는 것을 상상하여 기술로 실현하는 이른바 ‘기술적 상상력’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지만 기술적 상상력을 현시하기 위한 그 기술적 도구는 도대체 어떤 것들이란 말인가? 물론 이 질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스스로에게 매일같이 묻는 것이기에 속 시원한 해답을 찾을 길이 없다. 더욱이 바로 그 구체적인 방법론을 찾아가는 것이 자신의 디자인 어휘를 구축해가는 과정일진데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가 찾아야 할 몫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해도, 이런 질문들에 대해 명확한 자기 주장과 방법론을 펼쳐온 건축가들의 말과 작품을 통해서 그 전반적인 윤곽을 살펴보는 것은 항상 유익한 출발점이 된다. 예컨대 벤 반 버클(Ben Van Berkel)의 「무브MOVE」라는 책을 꺼내보자. 첫 권에서 ‘상상력’에 대해 말한 이 사람이 두 번째 권에서 들고나온 이슈는 기법이다. 그는 기법이 추상적 사고와 구체적인 생산을 연결하는 양방향의 교량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기법은 단지 생각을 현실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생각을 형성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항공사진을 바탕으로 꼴라주 기법으로 그려진 제임스 코너의 맵핑이미지를 떠올려 본다면 새로운 시각의 물질성과 공간성, 그리고 순간성을 담고 있는 이 기법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벤 반 버클은 잘 알려진 바대로 그 구체적 기법인 다이어그램을 주창해왔다. 그의 왈, 다이어그램에 입각한 실무는 기호의 침투를 연기시켜서 재현적 디자인 기법에 반한 대안을 창출하도록 한다고 한다. 쉽게 말해 진부함이나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고 창조적인 디자인의 대안이 된다는 말이다.
다이어그램이나 맵핑은 결국 시각적 언어라는 점에 있어서 같다. 이것들은 마치 서예가 그렇듯이 그림과 글자, 표현과 내용, 형상과 구조 사이를 연결시킨다. 요컨대 우리가 개발할 프리젠테이션 기법은 그림글자 또는 형상구조가 아니겠는가!
실무에 종사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빈번히 프리젠테이션에 참여하게 된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훌륭한 프리젠테이션은 말 그대로 새로운 현실을 현시할 때만 가능하다. 새로움이 없을 때, 즉 상상력이 빈곤할 때, 프리젠테이션은 지루해진다. 반면 기존의 현실과 동떨어진 구름 속의 상상력일 때, 프리젠테이션은 공허해진다. 또한 치밀한 분석과 새로운 개념이 있더라도 충분히 시각적이고 공간적이지 못할 때 프리젠테이션은 전달되지 못한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세상의 사소한 변화를 위해서라도 이성과 더불어 감동으로 동기화된 사람들 없이는 곤란하다. 바로 그 동기화의 싹을 틔우는 작업이야말로 프리젠테이션의 지향점일 것이다.
필자가 자주 인용하는 말 중에, “배움은 시(詩)로서 일어나고, 예(禮)로서 바로 서고, 음악(音樂)으로 완성된다.”는 공자님 말씀이 있다. 모든 배움과 성장의 과정이란 현실의 파편을 새롭게 조직하는 시적 상상력으로부터 출발해서 원칙과 원리들의 구축을 통해 견고한 시스템을 갖추며, 궁극적으로 음악과 같이 보편적인 감동으로 완성된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똑 같은 과정과 단계를 프리젠테이션이라는 행위에 투사해볼 필요가 있겠다. 다시 말하지만 프리젠테이션이란 현재의 재구축을 통해서 미래에 자신을,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들 공동체를 던져서 실현하는 일련의 기획이기 때문이다.
글 / 신승수(아름건축) c3korea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