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단상_작업을 하면서 들었던 생각들
My Working Note
건축작업을 하면서 평소에 들었던 말들과, 단상들을 몇 가지 골라 소개해 본다. 글을 정리하면서 참 대단한 것이 없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 별다를 것 없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들을 깨닫는 과정이 작업의 실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020302 계동 8평짜리 한옥을 고치면서 김 대목이 한 말
건물을 줄여서 길에서 20cm정도 들여 지은 까닭에 대하여, “원래대로 한다면야, 필지에서 들여서는 안되지. 하지만 여기 북촌에서는 길을 지나다, ‘아 이거 누가 공사한 거야? 누구 집이야?’ 이런 말이 나오면 안좋거든. 그러니까 길이 넓어야 하는 거지. 그리고 그게 집한테도 좋은 거야. 좁은 길에 있는 집을 누가 좋아하겠어.”
020321 대치동 k 다세대주택 현장에 있던 반장님의 말
“뭐 잘하셨지만, 한 말씀 드려야지. 건축이란 샵 드로잉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살 집이니, 등 따숩고 살기 좋으면 되는 것 아니오. 0.5mm 이런 거 따지는 것은 뭐 우주선 쏘아 올릴 때나 하는 말이지, 소장님이 다음에 설계하실 땐 이렇게 복잡하게 하면 안됩니다. 집은 무엇보다 실용성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의 말도 어느 부분 옳았다. 건축가는 끊임없이 관계성을 증폭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삶과 관계없는 관계성이 늘어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건축가인 우리들은 계속 디자인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 않은가. 무엇하나 아구가 맞지 않는 집을 보며 경멸하거나 화를 내면서, 삶의 실용성보다는 디자인이 잘된 집을 짓기 위해, 많은 설계비와 공사비를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020717 아버지에게서 전해들은 말
“야, 정구야, 내 친구 김 소장 말이다. 그 사람 말이, 처음에 시작할 때는 이거 오래 하면 기술도 늘고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에는 구청이다 계약이다 해서 영업적인 일로만 바쁘다고, 너를 만나면 해줄 말이 아주 많다 하더라.”
031208 놀다가 지친 것은 나였다.
namu는 좀처럼 잠들지 않는다. 퇴근하여 가장 하고 싶고, 일하면서도 그리는 장면은 namu와 즐겁게 노는 일이다. 그런데 잠자리에 들며 동화책과 그림책을 10권 정도 읽어주고 이야기도 지어주고 하여도, namu는 여전히 생생하다. 나는 졸린 것을 참아가며, 또 가끔씩은 얘기 중간중간에 졸아가면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왜 얘는 이리도 생생할까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오늘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생각이 났다. 자지 않는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 놀다 지친 내가 문제였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고, 그것에 정열을 다한다는 것, 그것은 때로 힘들고 고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치고 어려울 때도 그 대상을 탓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지쳐버린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040108
도쿄에서의 발표를 위해 글을 쓰고 있다. 한옥에 관한 글이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의문이 더 많이 생긴다. 왜 마당이 있을까? 왜 채를 나누었을까? 글을 쓰면서 더욱 알 수가 없어진다. 일을 할 때는 생각해 본적도 없는 것이었다. 과연 이런 것을 생각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일까? 나에게 어떤 계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한옥을 점점 더 깊이 공부하면서 그 깊은 맛과 향을 조금씩 알아간다. 전통건축은 가볍게 스치고 현대건축으로 넘어가려는 나의 마음을 잡아 지긋이 누르고 있는 듯, 세상의 일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가만있어도 운명은 천천히 자리를 찾아가는 것인지…….
040120 guga 세미나를 하다 내가 한 말
“우리들은 지금 크게 두 가지 주의에 빠져있다. 그 하나는 창의적인 건축가로서 사람들의 무료한 삶을 새롭게 바꿀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고 하는 ‘낭만주의‘가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척박한 세상 속에서 오로지 승리하는 것은 시장경제이며, 지금의 낡고 오래된 주거지는 모두 아파트로 재개발될 수 밖에 없다고 하는 ‘패배주의’가 그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우리의 불균형한 환경 속에도 반드시 현실화할 수 있는 건축과 방법론, 합의 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건축적 범주만이 아닌 비건축적 범주, 도시건축을 성립하게 하는 모든 여건들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실천적 작업에서 가능하다. 우리 현실에 더 나은 것을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고 찾아가는 ‘실천주의’가 반드시 필요하며, 그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는 점이다. 낭만의 고립을 넘고, 패배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 바로 그것이 실천이라 생각한다.”
040610
위대한 건축을 논하기는 애 저녁에 틀렸다. 그저 좋은 건축을 만들기 위해 혹은 단순하게 건축설계 일을 하며 먹고 사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를 깨닫는 순간이다. 매일을 달려도, 더 달릴 곳이 남아있다. 숨이 차지만, 잠시 쉬고 다시 행군을 해야 한다. 끝나지 않을 전쟁……. 아마도 세계적 건축가들은 경계를 넘어 예술의 세계로 탈출한 운 좋은 자들일 것이다. 그들은 애초부터 혹은 문화사회적 파도를 잘 타고 넘어, 이제 가라앉지 않는 배에 올라 유유자적하며 바다를 노래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060322 장식은 무죄다.
나는 요즘 장식에 애쓰고 있다. 서양의 근대가 선언했던 ‘장식은 죄악’이라는 말은 나의 상황과는 무관한 것으로 느끼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혼은 장식에 담겨 있었는지 모른다. 지금 현대의 건축이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가며 간단한 디테일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이 무엇인가를 현재의 시점에서 추려보고자 한다.
060326
아무리 내가 현대건축을 부정해도, 건축은 시대를 반영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즉 제국의 기술을 배웠다 해도, 그 적용의 정당성을 문제 삼는다 해도, 건축은 그 사회의 문제를 흡수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하나의 과정이며 그 결과인 것이다. 마치 우리의 노래가 여러 논란 속에서도 우리 사회의 여러 측면들을 노래할 수 밖에 없듯이 말이다.
060409 건축의 존엄성에 대하여
요즘처럼, 건축의 존엄성을 자주 떠올린 적이 없는 것 같다. 모든 건축이 위대한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존엄할 수 있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그런데 한 편으로, 주변의 존경하는 건축가들의 작업들조차, 모두 비슷한 모양과 재료들로 변해가는 모습을 본다. 평면은 삐뚤어지지 않으면 안되고, 슬라브는 둥글게 말아 올라가야 직성이 풀리고, 매스나 입면은 잘게 나누거나 찢어 놔야 하는 그런 것들……. 마치 요즘 음악이 거의가 비슷한 쏘싱과 서구음악의 영향권 아래서 아류를 형성하듯이 말이다.
다시 생각해도 건축은 존엄한 것이다. 그 존엄성은 우리의 삶과 땅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이제까지 이야기했던 형태들, 건축적 장난은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 건축은 장난스러운 혹은 옆에서 보기에도 안타까울 정도로 심각한 관념의 산물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언제부턴가 모델을 손으로 들고 살펴보듯이, 건축은 그렇게 세상과 떨어져 우리의 사고과정에 편입되고 만들어졌다. 땅과 떨어져 만들어진 건축들, 그 과정을 거치고 다시 대지로 내려온 건축 역시, 사실의 풍경을 조각 내고, 가리고, 변조하고 있다. 또 그 관념의 덩어리는 그 존재로는 강렬했지만 외로운 존재이기도 했다. 동네에 우뚝 서서, 자기만 한 여름 겨울코트 사나이가 되어 있기도 했다. 우리가 삶을 사는 과정에서 소중한 존재이고, 그러한 존재가 되도록 일상의 노력을 하듯이, 건축은 그렇게 존엄해야 하지 않을까. 겸손하게 왜 건축이 소중한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때가 된 것이다.
글 / 조정구(guga 도시건축) c3korea 0605